[산방일기] 실락원

[산방일기] 실락원

[ 산방일기 ] 장돈식의 산방일기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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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5월 24일(화) 00:00
방그러니 계곡은 나의 파라다이스. 이 무릉도원은 지금 한창 물이 올랐다. 스위스의 의사 폴 투르니에(Paul Tournier)는 그의 저서 '인생의 사계절'에서 소년기를 오뉴월에 빗댔다. 그 말을 원용한다면,우리집 뜨락의 자연은 지금 사춘기를 맞은 셈이다.

   
성경에서는 에덴 동산을 퍽으나 좋았던 곳으로 쓰고 있는데,그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손수 지으셨다지 않은가. 나보다 젊고 미남이었을 아담도 그곳과 잘 어울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 년 내내 벌거벗고 사는 곳이라면 문제가 있다. 여기는 겨울이면 자연의 향연이 있고,질탕한 봄,계곡의 흐름이 청렬한 여름,오색 단풍이 수려한 가을이 있다. 나의 낙원 백운산방엔 계절의 변화가 있다. 나는 에덴 동산에다 나체가 아름다운 이브를 얹어서 준대도 방그러니 계곡과 바꿀 생각은 없다. 20년 전을 떠올려본다. 아내는 병들고 나도 심신이 지쳐 세상사를 정리하고 마음을 비운 채 이 계곡을 찾아 입산하기까지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처음엔 그 동안 문명에 길들여진 생활 습성 때문에 산살림이 불편하기만 했으나 지금은 다르다. 아내를 사경에서 건져준 것은 물론,나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다시 알게 한 곳이다. 여기를 떠나 다시 옛생활로 돌아갈 수 없는 나를 발견한다. 맑은 바람,골 안에서 새로 피어난 풋풋한 구름,밤하늘의 별,이 모두를 누릴 수 있는 삶은 선택받은 삶이요, 보람찬 만년이다.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다.

그런데 몇 해 전 어느 날 몇몇 젊은이가 내 집 마당에서 도면을 펴놓고 측량을 하더니,말뚝을 박고는 뻘건 페인트를 칠했다.

남의 뜰에서 뭐하는 거냐고 물으니, 이곳으로 고속도로가 지나간다고 했다. 늙은이 놀리면 못쓴다고 나무랐더니 진담이라며 새해에는 이사를 해야 할것이라고 했다. 의사에게서 "당신은 암에 걸렸소"라고 선고를 받으면 이럴까,아무 생각도 판단도 할 수가 없었다. 현기증이 났다.

영국의 존 밀턴이 16세기에 쓴 '실락원' 제6편에서 사탄은 낙원을 파괴하는 작업으로 우선 지옥에서 에덴 동산까지 다리를 놓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의 방그러니 동산도 사탄의 다리가 아닌 문명의 다리,개발의 다리로 망가진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 앞산에도 터널을 뚫느냐고 묻자 젊은이는 자기 가슴 높이로 팔을 구부려 들고는 손을 앞으로 튕기며 산은 날린다고 한다. 마치 파리라도 쫓는 듯한 몸짓이다. 나의 외경의 대상 산을 날리다니! 분노를 넘어 허탈해진다.

사람이야 옮겨앉으면 된다지만 중장비를 피하지 못하는 저 생명들은 어쩌나. 38년 묵은,'보은댁'이라고 이름붙여준 마당가의 대추나무에는 올 봄에도 뻐꾸기가 앉아서 한 곡조 읊어 황홀했다. 교실만큼 넓은 상다리를 덮은 등넝쿨은 올해도 40센티미터 길이의 꽃을 5천송이나 피워 장관을 이뤘다. 산방 처마 끝에 8년째 깃들이고 있는 딱새 가족들,산방 밑 돌담 속에 굴을 파고 사는 다람쥐네 식구들.

그 언제일지 모르지만 내가 홀연히 세상을 하직하는 날,내 집 어귀에 고급차의 행렬이 있을 리는 만무하고,이승의 흔적이라야 자식들이 세워줄 돌비석 하나가 고작이겠지만,'20세기 말엽에 이 백운 계곡을 그지없이 사랑하다 간 한 노인을 나는 아노라'하며 저 앞산 암벽 위의 의연한 소나무 운이는 날 기억해주리라 믿었다. 어찌 오늘을 상상이나 했으랴! 절벽 밑에서 덜덜덜 소리를 내는 착암기 구멍에 화약을 채우고 발파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천년을 산다는 저 소나무가 처참하게 찢기며 계곡 흙바닥에 처박히는 최후를 지켜봐야 하는가. 가슴이 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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