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 음악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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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4월 26일(화) 00:00

유혜자의 음악에세이(84)

비가모의 산정(山頂)도시 아크로폴리스에 올랐을 때 터키의 찬란한 역사의 흔적은 머리 없는 황제의 석상과 부서진 신전뿐이었다. 기독교인들에게 경배를 강요했다는 황제의 얼굴 없는 석상의 어깨 위에는 무엄하게도 시든 올리브 이파리만 얹혀 있었다. 인간의 욕망처럼 쌓아올린 주피터의 제단도 돌기둥만 몇 개 서있는 사이로 바람만 감도는데 어디선가 피리소리가 실려왔다. 둘러보니 저만치에서 관광객으로 보이는 이방인이 단조롭고 애조 띤 멜로디를 반복해서 불고 있었다. 애수를 머금은 곡조는 공연히 남의 나라 역사의 무상함에 잠기게 했다.

그때 들은 피리소리처럼 슬프지는 않아도 단순한 멜로디가 향수를 불러오게 하는 음악으로 스페인의 음악가 타레가(Francisco Tarrega Eixea 1852-1909)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있다. 떨리듯이 되풀이 연주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 궁전에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리움이 울컥 솟아나게 하는 음악이다.

타레가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공장에서 근무하다가 후원자의 도움으로 마드리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화성학을 공부했다. 마드리드음악원 졸업 후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중 한 여인을 사랑했다. 그 여인은 미모의 여성으로 이미 결혼한 콘차 부인이어서 타레가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낙망하고 좌절한 타레가는 마음을 달래려고 여행을 떠났다. 고도(古都)똘레도를 거쳐 그라나다에 이른 그는 교외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찾았다. 그 궁전에서 깊은 감명을 받은 뒤 감정의 파노라마를 엮어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다. 남에게는 평화로움과 그리움에 잠기게 하는 이 음악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애가 있기에 안타깝고 간절한 사랑의 주인공이었던 타레가는 호응이 없는 여인에 대한 원망을 거두어야 했다. 그는 끝없는 절망에 주저앉지 않고 슬픔을 안은 채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문화유적지인 알함브라 궁전은 내부의 기둥,아치,천장,벽이 화려한 이슬람시대의 건축물인데 특히 왕성과 세 개의 정원이 아름답다고 한다. 넓은 정원이 딸린 여름별장인 '헤네랄리훼'에는 삼나무의 산책로가 아늑하다. 그리고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의 투명한 소리는 신비스러운 영감을 그에게 준 듯하다.

타레가는 이 물방울 소리를 듣고 떨리는 음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멜로디를 만들어 나갔다. 떨리듯이 되풀이하는 연주기법인 트레몰로는 맑고 깨끗한 물결이 흐르는 듯하게 이어진다. 그리고 지금은 영화가 사라진 고도(古都)의 향수가 담겨 조금은 쓸쓸한 음영이 배어있으나 그윽한 아름다움에 젖어들게 한다.

원래 이 음악의 제목은 '알함브라풍으로'였고 부제목으로 '기도'라고 붙였었다. 악보를 출판할 때 출판사에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으로 고쳐서 오늘까지 통용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다루는 기타,그 중에도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즐겨 배울 것이다.

오늘날 '기타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타레가는 전공은 피아노를 했지만 어려서부터 기타를 즐겨 연주해서 바흐,베토벤,쇼팽의 음악을 기타 음악으로 편곡해서 연주하기를 좋아했다. 당시는 기타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이 별로 없었는데 타레가의 편곡으로 기타 연주 음악이 많아졌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악기인 기타에 대한 작곡이었고 슬픈 사랑의 여운이 스며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기타 곡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곡으로 사랑 받고 있다. 연주가에게 생명인 팔이 쉰 네 살에 마비되어 그는 의도한대로 뜻을 다 펼치지 못해서 안타깝다. 팔이 마비되어 연주생활을 못한 채 3년 후 쉰 일곱의 나이로 숨을 거뒀지만 그의 제자들은 크고 생동감이 있는 '타레가 연주법'을 배워서 오늘날 세계 각국에 전파되게 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들으며 스페인 사람이 아니더라도 스페인과 다른 나라 역사에 있었던 일을 그리워하게 된다. 모든 예술의 근원이 그리움에서 비롯되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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