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참외

겨울참외

[ 산방일기 ]

이경남 기자 emilee20@onnurimail.com
2005년 03월 31일(목) 00:00
79회/ 장돈식 장로

엊저녁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기상 관계자들은 영동지방에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린 것은 100년만이라고 한다. 이곳 영서지방에도 많이 내렸다. 눈에 갇힌 서재(書齋)에 들어앉아 횡재라도 한 듯 설경(雪景)을 즐긴다. 하계(下界)에서는 차들이 눈에 막혀 뭉기적거리며 뒤엉긴 거리와 도로를 보노라니 같은 눈이 장소와 사람에 따라서는 낭만일 수도, 재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폭설의 어려움은 산골농가에도 있었다. 오늘 아침 보도에서는 영월의 한 농가를 비춰 준다. 그의 비닐하우스가 쌓이는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두터운 눈과 찢어진 비닐과 푹 삶아진 외넝쿨이 있고, 출하할 다 큰 참외가 지면에 흩어져 있다. 어쩌자고 하늘아래 첫 동네라는, 겨울이 유난히 추운 영월에서 겨울에 참외농사를 짓고 있었을까. 더구나 최고로 가격이 오른 기름을 때노라 밑천도 어지간히 들었을 것이다.

지난날의 농촌에는 '원두(참외)꾼'이라는 참외농사 전문 농군들이 있었다. 그들은 3월이 되면 밭을 갈고 두둑을 만든다. 씨앗을 정성스레 파종을 하고 기다리면 늦봄의 따스한 볕을 받고 싹이 트고 넝쿨은 자란다. 부지런히 김을 매며 가꾸다가 길 닿은 밭머리에 원두막을 짓는다. 7월 초 쯤 참외는 잘 익은 것을 가려 원두막을 찾아오는 마을 사람들에게 팔고, 시장출하도 서둔다. 건강한 넝쿨에서 영양을 받으며 제물에 익은 과일은 지금 시장진열대의 덜 익은 것을 미리 따서 후숙(後熟)시킨 것과는 그 맛이 다르다. 더구나 노천 재배한 제철의 참외와는 구별된다. 따라서 성급하게 비닐하우스 재배한 것을 먹는 사람은 제철의 참외의 시원하고, 달고, 아삭아삭하고 향기로운 그 감칠맛을 알지 못한다.

7월에는 준치, 10월에는 갈치, 이렇게 먹거리는 먹어서 좋은 때가 있다. 참외는 맥추(麥秋)의 계절에 제 맛을 낸다. 그 걸 잘 모르는 사람들은 조급히 제철참외에 값을 더 얹어주고 산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는 법, 그래서 농부들은 하루라도 빨리 출하하여 좋은 값을 받으려고 갖은 애를 쓴다. 처음에는 뿌린 씨앗 위에 기름종이 고깔 을 씌우다가, 비닐터널을 하다가 아예 하우스를 지었고, 엄동설한에도 그 안이 여름기후가 되도록 기름을 태워 열풍을 불어 넣는다. 출하시기를 앞당기다보니 그만 참외, 토마토 따위는 겨울과일이 되어 정작 제철에는 참외가 없다.

한국인들은 '여름을 겨울같이, 겨울을 여음같이'산다고 하니 이게 우리가 잘 산다는 말인 줄 알고 으시대던 때도 있다. 옛 어른들은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한다'고 했다. 말을 뒤집으면 '역천자(逆天者)는 망(亡)한다'는 말이 된다. 오죽 좋은가, 추운 계절에는 냉장창고에 갈무리울 저장과일이 동날 6~7월에는 수박, 참외, 복숭아를 먹으면 된다. 구태여 겨울에 비싼 연료 때가며 기른 창백한 색상(色相)의 강제로 익힌 과일을 먹어야 할 까닭은 없다. 에너지는 재사용이 불가능하기에 후대들을 생각해서 아껴야 한다.

계절을 벗어난 것들이 꼭 필요한 사람들이 있거든 겨울이 더운 제주도나 본토의 남쪽에서 연료가 많이 들지 않는 간단한 시설로 재배하면 될 것이다. 영월의 그 농가는 그곳에는 좋은 산수가 있으니 정서에 메마른 도시인들 불러들여 설경(雪景)을 보여주고, 뜨끈하게 장작 지핀 방에서 구수한 겨울음식이나 엿 따위 무공해 먹거리로 달래주면 서로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1980년대에 이태리에서 시작된 슬로우푸드 운동은 '즉석에서 서둘러 먹는'패스트 푸드나 인스던트 식품을 멀리하고 집에서 제철 재료로 제대로 만든 음식을 느긋하게 먹자는 운동이다.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 유럽을 중심으로 지금은 십 여 개국으로 확산 되었다고 한다. 우리도 여름과일이나 채소를 겨울에 먹으려고 성급하지 말고 질도 좋고 값도 싼 제철 채소나 과일을 찾아 합리적인 생활을 할 자세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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