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토에서 피어난 꽃

동토에서 피어난 꽃

[ 음악에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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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3월 11일(금) 00:00

유혜자/ 81회

소련이 개방되고 몇 달 지난 6월, 모스크바 체홉의 집 뜨락의 보라색 꽃과 톨스토이 기념관 마당의 진분홍 꽃, 그리고 크렘린 궁전 뒤뜰에 다보록하게 피어 있던 하얗고 노란 풀꽃을 신기하게 보았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체홉의 '벚꽃 동산'을 읽을 때 라일락과 벚꽃이 있었음에도 철의 장막에 닫혀 있던 소련과 꽃과는 무관한 존재로 여겼었다.

러시아 작곡가 프로코피에프(Prokofiev, Sergei 1891-1953)의 음악을 들으면서도 그런 신기함을 느꼈다. 1917의 러시아혁명 후, 불안한 러시아에서는 새로운 음악의 추구가 어려울 것으로 느낀 그는 1818년 미국으로 떠났다. 몇 달의 도피로 예정했었으나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로 옮겨다니며 활동하여 인기를 끌었다. 18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한 그는 고국이 그리워 1936년, 정세도 불안한 고국으로 돌아갔다. 가족과 만나고 소련의 영주권을 얻었으나 조국의 정치동향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 해에 소련작곡가 연맹이 창설되어 음악 통제 속에서 자유로운 창작생활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당분간 소품에 주력해서 ‘피터와 늑대’ 등 어린이음악을 작곡했다.

1945년 유명한 '제5심포니'를 직접 지휘하여 초연한 다음 건강이 악화되었다. 스탈린의 문화담당 비밀경찰 '즈다노프'의 동조세력들이 '피터와 늑대'를 쓰레기라고 비난한 데다 당시, 지적인 활동에 대한 심한 규제와 창작활동에 대한 억압이 최고조에 이르러 건강악화와 정신적인 피로에 시달려야 했다.

러시아태생의 스트라빈스키나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서 활동하다 숨을 거뒀고, 오이스트라흐나 로스트로포비치, 아쉬케나지 등 많은 음악인들은 서방세계에서 활동하며 고향 방문은 했지만 프로코피에프처럼 귀국한 경우는 없다. 청춘시절의 야망과 동경이 서방세계의 자유로움 속에서 어떻게 변형되어 인생행로를 바꾸려고 했는지 그 진실은 모른다. 그는 가족과 친구들(작곡가 미아스코프스키와 음악학자 아사피에프 등)을 만나고 싶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니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된다.

그의 첼로를 위한 명곡들은 스탈린의 지적활동에 대한 규제와 억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탄생한 것이어서 더욱 귀하게 생각된다. 그는 로스트로포비치의 첼로 연주를 듣고 감동해서 첼로작품들을 썼는데 첼로 소나타 C장조(op.119) 같은 훌륭한 작품을 쓴 것이다. 1948년 프로코피에프는 부인이 날조된 스파이 혐의로 노동자 캠프에 20년 수용선고를 받고 자신은 거의 병상에서 요양생활을 했다. 하루 한 시간 이상 작곡하지 말고 쉬라는 의사의 주의에도 불구하고 10여 곡을 썼다. 이 첼로 소나타는 고전적인 형식 안에 프로코피에프의 특징인 단순하고 풍부한 선율로써 음악을 얘기하듯 이끌어가서 다른 현대음악에서 느낄 수 있는 복잡하고 어려운 점이 없다. 따뜻하고 포근함, 풍부한 표현력과 색채감까지 느낄 수 있다.

서정성이 풍부하고 감미로운 1악장, 낙천적이고 기지에 넘치는 2악장, 그리고 서정적이고 로맨틱한 선율의 화려하고 박력 있는 3악장까지 다 듣고 나면 기분이 고조된다.
재다능한 음악적 재능을 지닌 그를 옥스퍼드 음악사전은 '모순덩어리의 존재'로 설명하고 있다 한다. 그가 망명생활 후 고향에 돌아가 작곡하여 스탈린 상을 받은 바이올린 소나타1번이 무거운 선율로 엄숙성이 깃들어 있어 당시의 음악적 통제가 연상되지만 이 첼로 소나타는 그런 선입견을 갖지 않아도 된다.

소련의 평론가들도 "새로운 삶의 모든 아름다움이 이 작품에 담겨 있는 듯하고 이것이 새로운 출발을 가능케 한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정신적인 압박과 육체적인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상상력과 음악적 성취를 위해 밝고 아름다운 곡을 써낸 프로코피에프. 비애를 깊숙이 삭여냈기에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비참한 삶 속에서 내면으로는 따뜻하고 자유로웠음을 느낀다. 그의 작품은 황량했던 땅에서 아름다운 빛깔로 피워낸 꽃들을 보던 경이감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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