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대한 순종

부르심에 대한 순종

[ 땅끝편지 ] 김경근 선교사 2

김경근 선교사
2024년 10월 23일(수) 09:17
현지 선교 동역자들과 한국교회를 방문한 김경근 선교사.
필자가 선교사가 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라고 믿는다. 난 우리 집안에서 첫 목사요, 유일한 선교사다. 아버지 계보로는 예수 믿는 자가 거의 없었던 걸로 안다.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심인당(절)을 다니던 아이였다. 나의 부르심(Calling)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한다.

불교 집안이었던 우리 집은 어머니의 회심과 결단으로 영적 전쟁을 치르고 가족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다. 청소년 시기, 기독교 신앙으로 자란 나는 대학 다닐 때 이스라엘 키부츠에 갔다.

그곳에서 처음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하나님은 내 안에 선교적 소명을 품게 하셨다. 장신대 신대원에 진학한 후 내 안에 있는 소명을 실제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1학년을 마친 후 결혼하고 곧장 몽골에 견습 선교사로 갔다.

이스라엘이 내게 소명을 심어준 땅이었다면 몽골은 그 소명을 확인케 하는 땅이었다. 하나님은 몽골에서 소중한 만남과 은혜를 부어주셨고, 난 선교사로의 헌신을 결단했다. 비록 지금은 유럽 땅 크로아티아 선교사가 되었지만, 몽골을 잊지 못한다. 그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립다. 몽골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신대원을 졸업하면 곧장 선교지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나의 바람은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나도 여느 다른 전도사들처럼 지역교회의 부교역자가 되었다. 대전에서 부교역자로 섬긴 교회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 한쪽에는 "빨리 선교지로 가야 하는데…" 라는 부담을 떨칠 수 없었다. 2005년 당시 내 나이는 35세였고, 세 명의 어린 자녀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선교를 포기하고, 한국에서 목회를 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내겐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었다. 그분과 한 선교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분께서 깨지 않는 한 내가 먼저 깰 순 없었다. 당장 선교지로 못 가면 선교 준비를 위해서라도 무조건 한국을 떠나야겠다는 당돌한 마음을 품게 되었고, 그로 몽골이 아닌 영국 유학을 계획하게 됐다.

아이 셋 달린 가장이 통장 잔액도 없고, 재정 후원도 없이 영국에 간다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리라!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 맞다면 이루실 줄을 믿었다(빌1:6). 영국대사관에서 최종 인터뷰할 때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선교지에 가려고 합니다. 영국은 단지 지나가는 정류장입니다." 그 진심이 통했는지, 얼마 후에 인터뷰 결과가 나왔다. 다섯 식구 모두 동반 비자를 받았다. 주님이 하신 것이다.

출국 당일이 되었다. 부모 형제를 떠나,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또다시 미지의 땅으로 간다. 젊은 날 '소명의 땅' 이스라엘에 갈 때는 혼자였다. 몽골이란 '결단의 땅'에 갈 때는 둘이었다. 이제 영국이란 '훈련의 땅'으로 갈 때는 다섯이 되었다. 점점 동역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 자녀들 또한 장래에 어떤 모양이든지 선교적 삶을 살게 될 것이다.

12인승 승합차에 두툼한 이민 가방 5개를 뒤 트렁크에 쑤셔 넣었다. 드디어 한국을 떠나게 된다. 환송과 격려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마음만은 비장했다. 긴장과 설렘, 기대로 만감이 교차했다.

인천공항에 거의 도착할 때쯤이었다. 뒤따라오던 과적 차량이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하고 추돌을 하고 만 것이다. 차량 뒤 창문과 범퍼가 산산이 박살 날 정도로 큰 사고였다. "아, 뒷좌석에 아내와 아이들, 여동생이 탔는데…." 정신 차려 돌아보니 다행히 모두가 멀쩡했다. 뒤 트렁크에 쑤셔 넣은 다섯 개의 이민 가방이 보호막이 된 것이었다. 기적처럼 모두가 다치지 않았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친 후에 우리는 겨우 정시의 비행기에 탑승하여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근데, 출국 당일 교통사고가 영국 땅의 복선일 줄, 그땐 어찌 알았으랴?

김경근 선교사 / 크로아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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