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더 넓은 세계를 이해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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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의 영화보기 ] <클레오의 세계>(2023)

최은
2024년 08월 14일(수) 13:34
여섯 살 클레오(루이스 모루아팡자니)는 엄마를 일찍 잃고 아빠와 살고 있다. 어느 날 클레오를 돌보던 보모 글로리아(일사 모레노 제고)는 모친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인 서아프리카 카포베르데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언제 다시 올 거냐는 물음에 "이번에는 안 돌아와"라고 글로리아는 답했다. 글로리아를 그리워하며 우울해져가던 클레오는 방학을 맞아 그녀를 만나러 가는데, 거기서 클레오는 글로리아에게 자신이 몰랐던 세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리 아마추켈리 감독의 '클레오의 세계'는 '로린다 페레이라 코레이아에게' 헌정된 작품으로, 2023년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 감독은 어린 시절 포르투갈 출신 이민자였던 보모를 기억하며 영화를 만들었으며, 로린다와 자신의 유대감을 바탕으로 아이 돌봄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세네갈 인근 서아프리카의 작은 섬나라에서 어린 클레오는 가장 먼저 글로리아의 아들과 딸을 만나 '나의' 글로리아가 누군가의 엄마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한다. 글로리아의 방 벽에 걸린 사진들도 클레오가 미처 몰랐던 글로리아의 다른 시간과 공간을 전시하고 있었다. 더욱이 글로리아의 십대 딸 난다(압나라 고메스)는 출산을 앞둔 임산부였다. 그건 글로리아에게 머잖아 손주, 즉 돌봐야 할 다른 아기가 생긴다는 뜻이다. 글로리아의 아들 세자르(프레디 고메스)는 한눈에도 클레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비밀스러운 글로리아의 남자친구도 문제다. 글로리아는 해변에 멋진 호텔을 짓고 있었는데, 이 모든 상황이 클레오에게 소외감을 유발했을 것이다. 글로리아가 그리는 꿈과 미래에 더 이상 클레오의 자리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클레오의 세계>에서 클레오와 세자르, 난다는 모두 엄마가 가장 필요했을 시기에 '엄마'를 빼앗긴 아이들이다. 그리고 글로리아도 얼마 전 엄마를 잃었다. 이 네 사람을 이어주는 정서는 상실감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영화 '헬프(2011)'에는 평생 17명의 백인 아이들을 키웠으나 정작 자기 아이는 남의 손에 맡겨야 했던 흑인 가정부의 사연이 있는데, 글로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글로리아가 파리에서 클레오를 돌보는 사이 세자르와 난다도 할머니 손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네 사람이 할머니의 무덤을 찾아 함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러므로 대단히 중요하다. 클레오는 여기서 울음을 터뜨리며 글로리아를 꼭 껴안는다. "우리 엄마도 암으로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너무 어릴 때라, 이젠 괜찮아요. 엉엉엉."

물론 이들이 한자리에서 흘린 눈물이 모든 상처를 당장 봉합해주지는 않는다. 특히 클레오에게는 글로리아의 손자 '산티아고'라는 큰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글로리아가 산티아고에게 불러주는 자장가를 듣고 있던 클레오는 섭섭한 마음을 표했다. "그건 내 노래잖아요!" 글로리아는 다정하고도 냉정하게 답한다. "클레오. 노래는 모두의 것이란다."

질투심에 불타던 클레오는 산티아고의 건강과 축복을 비는 의식을 지켜보던 중 아무도 모르게 악마에게 소원을 빌었다. "악마야 내 말을 듣고 있다면, 이 아기를 죽여줘. 글로리아가 나랑 같이 돌아갈 수 있게." 심지어 소원을 직접 실행하려고 까지 했다. 아기가 그치지 않고 울자 글로리아가 낮잠에서 깰까봐 애가 타던 클레오는 아기를 심하게 흔들고 목을 눌러 해치려 하다가 글로리아에게 혼이 났다.

이처럼 영화 '클레오의 세계'는 여섯 살 꼬마의 사악함을 천진함으로 포장하지 않고 그대로 전한다. 다만 다행스럽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일은 클레오와 세자르, 아기를 잃을 뻔한 난다와 글로리아 네 사람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회가 된다. 세자르는 자신의 방식으로 클레오를 보호했고, 난다는 아기를 위험에 빠뜨린 클레오를 용서했다. 짧은 여름의 끝, 글로리아는 클레오의 목에 자신의 돌고래 목걸이를 걸어 변함없는 애정을 확인해주었다.

세계가 나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하면서, 아이는 성장하기 마련이다. 신앙과 인격의 성숙도 바로 그 지점에서 도약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나 개인의 구원자일 뿐 아니라 그분이 기억하시고 사랑하시는 더 넓은 세계와 그분의 다른 자녀들이 있다는 것, 나에게 비호감이거나 사랑받을 만 하다고 내가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고, 그의 세계 안에서는 그분이 '아바 아버지'이고 둘도 없는 '엄마'라는 점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지 않던가. 클레오가 글로리아의 친자녀들과 손자를 그녀가 품고 있는 더 너른 세계의 일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 '엄마' 하나님은 클레오가 좋아했던 소중한 돌고래 목걸이를 떼어 클레오에게 선물로 줄 만큼 클레오에게만 특별한 존재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신비로운 것은 그 둘이 충돌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의 생각이나 계산과 같지 않은 그 사랑의 넓이와 깊이,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곧 성장이고 성숙이라고 믿는다.



최은 영화평론가·모두를위한기독교영화제 부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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