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여성과교회 ] 경남지역 여전도회 19
탁지일 교수
2024년 08월 22일(목)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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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한국전쟁의 마지막 피난처인 동시에 복음의 수호지였다. 평양에서 이남으로의 한국교회 중심이동은 마침내 한반도 땅끝 부산에 이르게 된 것이다. 성서와 기독교역사에 나타난 선교가 그렇듯이, 즉 스데반과 수많은 초대 교인들의 순교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세계로 흩어진 것처럼, 전쟁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복음의 전국화를 가능하게 했다. 전쟁의 참화와 교단의 분열이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경남부인전도회는 발전적 분립과 함께 본래의 사 명인 선교를 지속하면서, 설립 50주년 희년을 맞게 된다.
# 복음을 품은 피난지 부산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마지막 피난처였다. 1952년 부산에서 만들어진 찬송 가사처럼,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 할꼬'라는 탄식과 외침이 있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땅이었다.
찬송 '눈을 들어 하늘 보라'의 작곡자 박재훈에 따르면, 1952년 부산 광복교회 2층에 머물고 있던 그가, 당시 울산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20대의 석진영의 가사를 받고 나서, 피난지 부산의 생생한 모습을 생각하며, 단 10분 만에 작곡했다고 한다. 이후 피난교회들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전국적 확산은 자의적인 복음전도 노력과 함께, 한국전쟁으로 인해 불가피한 피난을 통해 이루어졌다. 남과 북에서 부산으로 몰려온 피난민들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 각지로 '흩어진 자들'과 다름없었다. 한국교회와 함께했던 선교사들도 모두 일본으로 철수했다.
선교 초기와 일제강점기의 한국장로교 중심은 서북지역이었다. 한국교회의 교세는 서북지역과 비서북지역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한국장로교의 중심이었던 서북지역 기독교는 1948년 북한정권의 수립과 함께 남하했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다. 한반도의 땅끝에 위치하는 부산은 한국전쟁 시기에 복음을 품고 보호했던 마지막 피난처가 된다.
한국전쟁 당시 여러 피난교회들이 부산에 설립되었고, 이들은 현재의 중대형 교회로 성장하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기념일은 부산지역 기독교의 도약의 시기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롭기만 하다. 민족의 아픔이었던 한국전쟁이 부산교회 성장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 피난교회의 설립과 역할
한국전쟁의 피난민들로 인한 교회들이 곳곳에 설립되기 시작했다. 본 교단의 영도교회(1951), 구덕교회(1951), 부산영락교회(1951), 땅끝교회(1951), 모라교회(1951), 양정중앙교회(1951), 연산제일교회(1951), 산성교회(1952), 감만교회(1953), 동래중앙교회(1954) 등의 교회들이 이 시기에 세워졌다. '평양노회사'는 피난지 부산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부산은 피난민으로 꽉 차 있었다. 정부도 부산으로, 모든 학교도 부산으로, 공공 기관과 기업체들도 부산으로 갔다. 물론 서울시민과 3.8 이남 사람들도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에는 갑자기 삼천리강산에서 전부 모여든 13도민 박람회장과 같이 되었다. 좋은 일로 화려하게 모여든 것이 아니라,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온 비극의 연속이었다."
피난교회들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첫째, 고향교회를 떠나온 신앙인들을 위한 신앙적 안식처였다.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가득한 피난처에서 절박한 신앙생활이 이루어졌다. 둘째, 고향의 가족과 지인들을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였다. 사랑하는 가족의 안부를 묻고 들으며 재회를 다짐하던 곳이었다. 셋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정보와 소통의 공간이었다. 피난민들은 교회에 모여, 고향사람들을 만나 소식을 듣고, 피난살이를 위한 정보를 공유했다. 피난지 부산에서의 신앙인의 아픔과 소망은 다음의 기록에 잘 드러나 있다.
"부산 광복교회를 중심으로 3.8이북에서 피난 나온 기독 청년들이 면려회를 조직하고 주일 오후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951년 4월 마지막 주일에 청년 면려회 회장이 예배 사회를 인도하고 이렇게 광고를 냈다. '여러분, 오는 주일은 오월 첫 주일 꽃주일(어린이주일) 이올시다. 우리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보수산으로 모여 같이 예배를 드립시다. 다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말했다.
오월 첫 주일 보수산에는 100~150명이 넘는 교인들이 몰려 올라왔다. 사회는 김윤찬 목사가 했고 김인서 장로(후에 목사가 됨)가 '예루살렘을 생각하라'라는 제목으로 눈물로 설교했다. 눈물 어리고 목메인 기도 소리는 평양성을 그리워하는 그들의 마음, 객고에 시달리고 괴로움에 이지러진 마음, 고향을 그리며 무엇인가 갈급하게 찾는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드리는 제단으로 공중에 메아리 쳤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슬프고도 외로와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이 찬송을 부를 때 손수건은 눈물로 적시어졌고 찬송가가 울음소리로 변했다."
임시로 머물 뿐이라고 생각했던 피난지 부산에서 여생을 보낸 피난기독교인들이 아직도 부산지역 교회들에 남아,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탁지일 교수 /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
# 복음을 품은 피난지 부산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마지막 피난처였다. 1952년 부산에서 만들어진 찬송 가사처럼,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 할꼬'라는 탄식과 외침이 있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땅이었다.
찬송 '눈을 들어 하늘 보라'의 작곡자 박재훈에 따르면, 1952년 부산 광복교회 2층에 머물고 있던 그가, 당시 울산중학교 국어교사로 있던 20대의 석진영의 가사를 받고 나서, 피난지 부산의 생생한 모습을 생각하며, 단 10분 만에 작곡했다고 한다. 이후 피난교회들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전국적 확산은 자의적인 복음전도 노력과 함께, 한국전쟁으로 인해 불가피한 피난을 통해 이루어졌다. 남과 북에서 부산으로 몰려온 피난민들은 스데반의 죽음 이후 각지로 '흩어진 자들'과 다름없었다. 한국교회와 함께했던 선교사들도 모두 일본으로 철수했다.
선교 초기와 일제강점기의 한국장로교 중심은 서북지역이었다. 한국교회의 교세는 서북지역과 비서북지역으로 나뉘어졌다. 하지만 한국장로교의 중심이었던 서북지역 기독교는 1948년 북한정권의 수립과 함께 남하했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부산으로 이동했다. 한반도의 땅끝에 위치하는 부산은 한국전쟁 시기에 복음을 품고 보호했던 마지막 피난처가 된다.
한국전쟁 당시 여러 피난교회들이 부산에 설립되었고, 이들은 현재의 중대형 교회로 성장하게 된다.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기념일은 부산지역 기독교의 도약의 시기와 맞물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신비롭기만 하다. 민족의 아픔이었던 한국전쟁이 부산교회 성장의 전환점이 된 것이다.
한국전쟁의 피난민들로 인한 교회들이 곳곳에 설립되기 시작했다. 본 교단의 영도교회(1951), 구덕교회(1951), 부산영락교회(1951), 땅끝교회(1951), 모라교회(1951), 양정중앙교회(1951), 연산제일교회(1951), 산성교회(1952), 감만교회(1953), 동래중앙교회(1954) 등의 교회들이 이 시기에 세워졌다. '평양노회사'는 피난지 부산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부산은 피난민으로 꽉 차 있었다. 정부도 부산으로, 모든 학교도 부산으로, 공공 기관과 기업체들도 부산으로 갔다. 물론 서울시민과 3.8 이남 사람들도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에는 갑자기 삼천리강산에서 전부 모여든 13도민 박람회장과 같이 되었다. 좋은 일로 화려하게 모여든 것이 아니라,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온 비극의 연속이었다."
피난교회들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했다. 첫째, 고향교회를 떠나온 신앙인들을 위한 신앙적 안식처였다.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이 가득한 피난처에서 절박한 신앙생활이 이루어졌다. 둘째, 고향의 가족과 지인들을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장소였다. 사랑하는 가족의 안부를 묻고 들으며 재회를 다짐하던 곳이었다. 셋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정보와 소통의 공간이었다. 피난민들은 교회에 모여, 고향사람들을 만나 소식을 듣고, 피난살이를 위한 정보를 공유했다. 피난지 부산에서의 신앙인의 아픔과 소망은 다음의 기록에 잘 드러나 있다.
"부산 광복교회를 중심으로 3.8이북에서 피난 나온 기독 청년들이 면려회를 조직하고 주일 오후에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1951년 4월 마지막 주일에 청년 면려회 회장이 예배 사회를 인도하고 이렇게 광고를 냈다. '여러분, 오는 주일은 오월 첫 주일 꽃주일(어린이주일) 이올시다. 우리 북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보수산으로 모여 같이 예배를 드립시다. 다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말했다.
오월 첫 주일 보수산에는 100~150명이 넘는 교인들이 몰려 올라왔다. 사회는 김윤찬 목사가 했고 김인서 장로(후에 목사가 됨)가 '예루살렘을 생각하라'라는 제목으로 눈물로 설교했다. 눈물 어리고 목메인 기도 소리는 평양성을 그리워하는 그들의 마음, 객고에 시달리고 괴로움에 이지러진 마음, 고향을 그리며 무엇인가 갈급하게 찾는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드리는 제단으로 공중에 메아리 쳤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슬프고도 외로와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곧 가까이 오셔서....' 이 찬송을 부를 때 손수건은 눈물로 적시어졌고 찬송가가 울음소리로 변했다."
임시로 머물 뿐이라고 생각했던 피난지 부산에서 여생을 보낸 피난기독교인들이 아직도 부산지역 교회들에 남아, 한국전쟁의 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탁지일 교수 / 부산노회여전도회연합회 10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