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바리로 산다는 것

벗바리로 산다는 것

[ 주간논단 ]

김지은 목사
2024년 06월 18일(화) 15:44
미국장로교(PCUSA)는 '마태복음 25장(Matthew 25)' 운동을 한다. 마태복음 25장 31-46절에 초점을 맞추며 그런 '마태 25' 교회가 되려고 한다. 마지막 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께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도 하나님께 중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이 교훈은 우리 안에 지극히 작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관점을 환기한다. 2016년 총회 결의로 시작된 이 운동은 마태복음 25장의 지침에 따라 선교와 사역에 대한 헌신을 다시금 확인했다. 이 운동은 세 가지 주요 초점에 집중한다. 활력 있는 교회를 건설하고, 구조적 인종차별을 해체하고, 제도적 빈곤을 근절하려는 다짐이다. 이와 함께 노력하는 교차적 우선순위로 기후 변화, 젠더 정의와 이성주의자 가부장제, 군사주의 등이 있다. 이 운동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더 깊은 성찰과 이해로 이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부르심 받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르심 받았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환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환영한다. 분열된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때 하나님의 화해 사역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시골과 도시, 크고 작은 사회, 젊은이와 노년층 등 모든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안녕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섬기는 것이다. 저렴한 주택부터 커뮤니티 가든, 공평한 교육 및 고용 기회, 중독 및 정신 질환 치료, 정책 변화 제정에 이르기까지 마태복음 25장 운동에 참여하는 방법은 교회 담장을 넘어 다양하고 구체적이다. 예수님은 일상생활에서 지극히 평범한 연민과 공감과 환대의 행동을 실천하며 수행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포로된 자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좋은 소식, 곧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복음을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일을 이어가는 것이다.

홍은전의 '그냥, 사람'이라는 책을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작가 홍은전은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활동했고 인권의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몇 권의 책을 썼다. '그냥, 사람'은 한국사회에서 그야말로 약하고, 쉽게 간과의 대상이 되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밀려나는 지체의 삶과 목소리에 주목한다. '벗바리'라는 꼭지의 글에서 서른세 살 나이로 죽음을 맞이한 '박현'이라는 어느 장애인의 목소리를 담담히 전하고 있다. 박현이란 분이 속한 탈시설 장애인들의 모임 이름은 '벗바리'. 누구도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 '뒷배를 보아주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는 '벗바리'를 통해 비로소 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강자가 사라져야 약자가 사라질 거라고 말한다. 나는 순서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심장이 아니다. 가장 아픈 곳이다. 이 사회가 이토록 형편없이 망가진 이유, 그것은 혹시 우리를 버려서가 아닌가. 그들은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한 사람들, 이 세상의 브레이크 같은 존재들이다. 속도를 낮추고 상처를 돌보았어야 한다. 상처 난 곳으로 온갖 악한 것들이 꿀처럼 스며드는 법이다. 약자가 없어야 강자가 없다. 가장 아픈 곳으로부터 연결된 근육들의 연쇄적인 강화만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냥, 사람', 79).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이 땅에 오지 않으셨다. 그냥 인간이 되어 오셨다. 그것도 인간의 보호와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갓난아기로 오셨다. 인간 중에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보잘것없는 인간으로 사시다가 연약한 모습으로 죽으셨다. 우리가 따르도록 부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러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언제?'라고 반문하며 보잘것없는 이들을 돌보는 행동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일상의 자리에서 수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행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어서 그럴 것이다. 반면에 염소들은 하나같이 '우리가 언제?'라고 반문하며 자신들이 언제 보잘것없는 이들을 돌보아 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한다. 어쩌다 한번 인심 쓰듯 베푸는 호의와 자선이어서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의 벗바리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노동운동가 전태일은 자신의 몸을 던지지 않고선 자신의 연민을 세상에 알릴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닫자 22살의 젊은 몸을 스스로 불살랐다. 어린 여공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몸서리치게 외쳤지만, 누구 하나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학생 친구 한 사람 있었으면'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결국 이루지 못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쟁쟁히 들려오는 말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누구를 향해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방향이 중요하다. 태도와 방식의 문제이다. 무엇보다 본질적 질문, "뭣이 중헌디?"를 진심으로 물어볼 때이다.



김지은 목사/미국장로교회 세계선교부 동아시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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