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연설가에서 민족운동가로 |2019. 01.08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6. 안창호 <2>

안창호는 구세학당을 다니면서 근대학문을 접했다. 구세학당은 초등교육과정이어서 깊이 있는 학문에 이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선교사로부터 얻게 되는 엷은 지식을 통해서도 자신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즉 다른 나라의 간섭과 침략으로부터 자주적으로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라의 힘은 '덕(德)을 지니고 지(智)를 겸비한 나라의 백성'이 많아질수록…

"예수 믿고 문명개화하여 애국하자" |2019. 01.01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6. 안창호 <1>소년 안창호의 꿈

안창호(安昌鎬)는 행정구역으로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봉상도, 지리적으로는 대동강 하류의 여러 섬 가운데 하나인 도롱섬에서 농사짓는 안흥국(安興國)의 셋째 아들로 1878년 11월 9일 태어났다. 그의 나이 열일곱 나던 해인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평양성 전투를 비롯하여 평안도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전화(戰禍)가 휩쓸고 지나간 후 사람들의 삶은 처참하였다. 이를 목격한 소년 안…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서 순국 |2018. 12.25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5. 김병조 <3>마지막 여생을 조국 위해 바치다

김병조 목사는 1933년 4월 귀국 길에 올랐다. 3.1운동 때의 일은 공소시효가 끝난 뒤였다. 거주지가 용천군 양서면 일대 30리로 제한되었으므로, 그곳에 소재한 동상·북평·신서교회를 목회하면서 경신소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1941년 정주군 묘두산 아래로 거처를 옮기고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대한민국 임정에서 독립운동에 종사 |2018. 12.18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5. 김병조 <2>상해·서간도에서 디아스포라 선교

중국 상해에 도착한 김병조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곧장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8월 18일 외교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자 그는 목사와 장로 출신 의원 11명의 연명으로 '한국시사진술서'를 발표하고, 이어 손정도와 '한국기독교 대표들이 중국기독교계에 고하는 글'을 발표했다. 또 '독립청원서'를 작성한 후 김규식(金奎植)을 통해 국제연맹에 제출함으로써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1…

무명의 목사, 민족대표 33인에 선정되다 |2018. 12.11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5. 김병조 <1> 김병조(金秉祚, 1877~1950) 목사

김병조는 한국교회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무명(無名)의 목사이다. 더욱이 그가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다. 그러나 그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면 평생토록 목회자의 길을 걸으면서도 3.1운동으로부터 출발하여 임시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독립운동가이다. 또한 서당의 훈장에서 출발하여 변산학교(평북 구성)와 인성학교(중국 상해) 경신학교(평북 용천) 등을…

조국의 자유·통일 위해 목숨 바치다 |2018. 12.04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4. 조만식 <3>조만식과 북한의 3.1절 기념식

명년이 1919년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2500만 우리 동포가 1919년 3월 1일 일본을 향해서 독립만세를 불렀고,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이 4월 11일 임시정부를 만들어서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갔고, 그 결과 오늘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졌다. 그러면 조만식은 3·1운동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조만식은 3·1운동의 기독교 측 대표였던 남강 이승훈의 측근이었다. 조만식은 1913년부…

'분단 없는 자주 독립국가' 신념 |2018. 11.20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4. 조만식 <2>해방 후 조만식이 꿈 꾼 나라

해방 이후 북한에서 조만식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다. 조만식은 오래 동안 평양을 거점으로 반일민족운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중심세력 가운데 하나인 기독교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 거주하는 가장 분명한 민족지도자였다. 오늘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소련이 조만식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김일성을 내세워서 만든 정권이다. 그러면 원래 조만식이 꿈꿨던 나라는 어떤 …

'민족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 |2018. 11.13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4. 조만식 <1>조만식과 일제 강점기의 기독교 독립운동

해방 직후 북한사회의 가장 중요한 민족지도자는 조만식이었다. 당시 남한에는 수많은 지도자들이 서로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싸웠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유일하게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지도자는 조만식이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하나님은 북한 땅에 오직 조만식 한사람만 남겨 놓으셨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조만식이 어떻게 북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남은 지도자가 되었을까? 이 이야기의 시작은 그…

"조선, 두 글자 죽어도 잊을 수 없어…" |2018. 11.06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3. 남궁억 <3> 민족교육

1933년 12월 10일 홍천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을 때, 일제의 한국강점을 이토 히로부미와 그 주구(走狗) 이완용이 국왕을 협박하여 국권을 찬탈한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것(일제의 한국강점)만은 … 죽을 때까지 반대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다. 결코 반제국주의이므로 처벌한다면 어떤 벌을 받아도 상관없다. " 남궁억은 심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나는 결코 반제국주의 이므…

가난한 학생들 배려…구국계몽활동 앞장 |2018. 10.30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3. 남궁억 <2> 생애와 모곡학교

학생과 학부모에게 무궁화를 심게 한 데는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1934년 5월 2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판사 마스무라 후미오가 모곡학교의 설립과 운영 방법을 묻자 남궁억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학교 설립 당시의 아동은 830~840명 정도이었다. 그렇게 해서 3, 4년 경영하다가 그 무렵부터 미국 선교부에서는 학교의 유지비를 보낼 수가 없게 되어 나는 조…

무궁화와 함께 심은 민족의식 |2018. 10.23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3. 남궁억 <1> 민족의식을 심는 교육자

1934년 5월 30일 '십자가당 사건'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을 때, 조선총독부 판사 마스무라후미오(增村文雄)가 남궁억(南宮檍)에게 작년 4월 모곡교회 예배당에서 '일한병합', 즉 일제강점을 말하며 대단히 분개하며 울었다는데 이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나는 예배당뿐이 아니라 모곡(牟谷)학교에서 친구들이 왔을 때라든지 언제라고는 할 수는 없으나 일한병합(日韓倂合)에 대해서 생각하고 …

평생 교육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한 여걸 |2018. 10.16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2. 김순애 <3> 독립운동의 산증인, 87세 별세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의준비회가 소집 선언서를 발표하고 9월 1일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다고 공고하였다. 그 후 각처에서 국민대표회의 촉성회가 조직되는 등 활발한 준비 작업 끝에 마침내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3일에 개막하였다. 이 회의에 국내, 상해, 만주 일대, 북경, 간도, 연해주, 미주 대륙 등에서 활동하는 135개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모였는데, 최종 125명의 국민대표가 …

민족의 독립 위해 몸 던지다 |2018. 10.02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 열전 2. 김순애 <1>기독교 여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김순애(金淳愛, 1889-1976)는 기독교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김순애의 형제자매인 필순(오빠)과 필례(동생) 그리고 조카 김마리아(본명 김진상) 등은 일제 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며 헌신한 신앙인이었다. 김순애의 오빠 필순(弼淳, 1878-1919)은 한국 최초의 의과대학인 '의학교'의 제1회(1908) 졸업생이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김필순을 비롯한 졸업생 7명에게…

100년 앞선 생각…'마을교육공동체' |2018. 09.18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 열전 1. 남강 이승훈 <3>이상적 마을 공동체를 꿈꾸다

남강은 다채로운 인물이다. 젊을 때는 유능한 상인으로서 역량을 발휘했고, 이후 도산과 함께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이끌기도 하였고, 나아가 3·1운동을 주도하는 민족지도자로서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민족기업육성운동, 언론과 출판활동을 통한 민족계몽운동, 교육구국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평양자기회사와 태극서관을 설립·운영하…

"난 본래 불학무식…하나님이 이끄셨다" |2018. 09.11
[ 3.1운동100주년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 열전 1. 남강 이승훈 <2>열정적인 그리스도인

한말이나 일제강점기의 기독교는 당시 인구의 1.3% 정도(1919년 기준)만 믿는 소수의 종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난의 시기에 민족운동을 이끌었던 이들 중 다수가 기독교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오늘의 기독교신앙을 돌아보게 한다. 초창기 민족운동을 주도했던 신민회는 상동감리교회 담임목사와 교사들이 중심이 된 기독교정신의 비밀결사단체였다. 105인 사건으로 일제의 감옥에 투옥되어 고초를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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