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눈으로 세상 비추는 시 쓰고 싶다"

"눈먼 눈으로 세상 비추는 시 쓰고 싶다"

[ 제20회기독신춘문예 ] 시 당선소감

우현준
2023년 01월 12일(목) 08:44
지난가을, 눈이 멀었다. 넓은 부엌창 너머 눈 쌓인 소백산이 보이지 않는다. 시력이 서서히 멀어가다 실명하는 망막색소변성증이 병명이다. 지금은 허허로운 12월의 끝자락, 아내가 부스스 일어나 커튼을 열며 아이처럼 해맑게 말했다.

"오빠. 펑펑 눈이 와. 펑펑, 세상이 하얗다."

창문을 열고 방충망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에 차갑고 부드럽고 가벼운 눈이 내려앉는 느낌이 좋았다. 눈을 크게 떠도 눈은 보이지 않고 시린 손을 오므렸다. 눈송이 녹는 손을 불쑥 아내의 잠옷 주머니에 넣었다. 깜짝 놀라는 아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아내의 얼굴을 오래오래 보고 싶다고 오래 기도했다. 흰 눈을 못 봐도 괜찮고, 글자를 못 봐도 괜찮고, 세상을 못 봐도 괜찮지만, 봄날 수선화처럼 미소 짓는 아내의 얼굴은 보고 싶다.

지금은 마음으로 보는 연습 중이다. 실명이 운명이라면 시도 운명일까. 시의 창으로 세상을 보려 한다. 눈먼 눈으로 세상을 비추는 불빛 같은 시를 쓰고 싶다. 나는 전교 꼴찌였고 아내는 전교 일등이었다. 꼴찌가 읽어도 가만가만 끄덕이고 일등이 읽어도 다시 읽고 싶은 시를 쓰고 싶다. 주변에 시를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실명처럼 캄캄하다. 어두운 시간에 빛을 비추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한 마음을 고개 숙여 올린다. 오늘 밤도 푹푹 눈이 내리고, 고마운 이름들을 부르며 하루의 문을 닫는다.



우현준 시 당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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