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0월 특집 ] 총회주제해설 (2) 주제성구해설(신구약)
한국기독공보
2024년 09월 11일(수)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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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주제성구해설 에스겔 37장 14절
에스겔 37장 14절은 '마른 뼈들의 환상'으로 알려진 에스겔의 세 번째 환상 보도(37:1-14)를 끝맺는 마지막 구절이다. 에스겔의 세 번째 환상은 "여호와의 손(권능)이 내게 임하여"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네 개의 환상 이야기 (1:3; 3:22-27; 8-11장; 37:1-14; 40-48장) 가운데 하나이다. '마른 뼈들의 환상' 보도는 다음과 같이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 환상의 상황(1-2절), 2) 예언의 위탁(3-6절), 3) 예언의 실행(7-10절), 4) 환상의 해설(11-14절).
1) 환상의 상황(1-2절)
첫 번째 단락은 '환상의 상황'을 소개한다. 에스겔서는 에스겔 자신의 전기적 보도와 같다. 에스겔은 야훼의 '손'이 자신에게 임했다고 말한다. 이 '손'은 야훼의 힘과 능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에서는 '권능'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압도하는 힘에 사로잡혀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야훼의 '영'이 함께 그를 이끌어간다. 야훼의 영이 에스겔을 이끌어간 곳은 '골짜기'였다.
에스겔이 야훼의 영에 의해 이끌려 간 그곳에는 뼈들이 가득하였다. 야훼께서는 그곳에서 에스겔을 뼈들 위로 이리저리 지나다니게 하셨다. 그것은 에스겔이 그곳의 뼈들을 자세히 관찰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죽임을 당한 자들'의 뼈들이었다(9절). 그것들이 나중에 회복되었을 때 '큰 군대(10절)'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뼈들은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뼈들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이끌림을 받아간 곳은 지난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전쟁터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정황을 생각하면 에스겔의 환상 보도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역사적인 경험을 반영한다. 에스겔이 경험한 골짜기의 마른 뼈들은 에스겔과 이스라엘이 경험한 전쟁의 패배와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주전 587년 바벨론 느브갓네살의 침공시 죽은 사람들과 주전 722년 앗수르에게 패망당할 때 죽은 사람들의 뼈들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에스겔의 환상은 상징적이면서도 실제적이다.
2) 예언의 위탁(3-6절)
두 번째 단락은 '예언의 위탁' 장면을 보여준다. 주 야훼께서는 에스겔에게 물으신다.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이것은 뼈들이 살아날 가능성에 대해서 묻는 질문이지만, 그 사실을 몰라서 하는 질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에스겔에게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신 32:39; 삼상 2:6; 또한 참조, 왕하 5:7)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를 보고자 하신다.
이때 에스겔은 "주 야훼여,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인간의 무력성과 하나님의 가능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답변이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이 가능성이 제로(zero)인 상황에서도 하고자 하신다면 그 일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이 6절에서 다시 한번 설명된다. 마른 뼈의 소생과 재생의 과정은 인체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이 야훼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야훼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시는 방법이자 도구는 '영'이었고, 그것의 결과는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이었다.
3) 예언의 실행(7-10절)
세 번째 단락은 '예언의 실행'을 보도한다. 에스겔은 주 야훼께로부터 명령받은 대로 예언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에스겔의 절대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세 번째 단락은 '예언의 실행'을 보도한다. 그런데 그것들 속에는 '영'이 없었다(8절). 여기에서 소생과 재생의 과정이 일시 정지된다. 그리고 야훼의 말씀이 다시 한번 나타난다(9절). 이제는 '마른 뼈들'이 아니라 '영'에게 예언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환상보도에서 핵심어로 나타나는 히브리어 낱말 '루아흐'가 얼마나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루아흐'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사방에서 불어오는 '영'을 묘사할 때도 사용된다. 그러니까 '루아흐'가 의미하는 다양한 의미, 즉 바람, 방위, 호흡, 영의 다양한 의미가 동시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창조의 영이시며, 동시에 '생명의 영'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에스겔은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예언한다(10절). 그러자 '영'이 새로운 꼴을 갖춘 몸들에 들어가 그들이 살아난다. 그러자 그들은 이제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발로 서게 된다. '매우' 마른 모습으로 '매우' 많았던 '뼈들'이 이젠 '매우 매우 큰 군대'가 된 것이다.
4) 환상의 해설(11-14절)
네 번째 단락은 '환상의 해설'이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이다. 야훼께서는 먼저 뼈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말씀하신다(11절). 그것은 '이스라엘 온 집'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뼈들로 표현된 이유를 설명하신다.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죽은 자'로 남아 있는 '이스라엘 온 집'을 위해서 예언하라고 하신다(12절).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이 무덤을 열고 올라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 땅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회복의 마지막 단계는 '나의 영'을 너희 속에 두는 것이다(14절). '야훼의 영'이 그들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그들이 '살아나게' 된다. 그들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땅에 들어가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너희가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주인이 누구이시며,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말이 야훼 자신이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증하는 것이다.
제109회 총회주제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이다. 이 주제는 대조되는 두 주체가 명시되어 있다. 그것은 '성령'과 '교회'이다. 이 두 주체는 각각 설명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부흥'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흥의 원동력이 성령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를 잘 뒷받침하는 것이 에스겔의 세 번째 환상 보도이며,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에스겔 37장 14절이다.
위의 본문 연구를 통해 우리는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세 가지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성령은 '생명의 영'이시라는 사실이다. 둘째, 성령은 '창조의 영'이시라는 사실이다. 셋째, 성령은 '지혜의 영'이시라는 사실이다. 에스겔의 세 번째 환상 보도와 유사한 주제를 담고 있는 본문이 에스겔 36장이다. 하나님의 영을 통한 이스라엘 회복과 갱신에 대한 예언이 소개된다(36:16-38). 이 가운데 회복의 마지막 단계로서 "내 영을 너희 속에 둔다"라는 내용이 에스겔 37장 14절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에스겔 37장 14절에서 약속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 자신들의 땅에서 거주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약속의 땅'인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가 지속적으로 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게 하시는 지혜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경택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신약 주제 성구 해설 사도행전 9장 31절
신약에서 '부흥'의 원형으로 꼽을 수 있는 사례는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교회일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초기 제자공동체의 사역을 보면, 지역적, 민족적, 숫자적 팽창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초대교회는 아무 문제와 도전이 없는 상태에서 부흥을 경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위협(행 4:18)과 투옥(행 5:17-18), 순교(행7:60)라는 박해에 직면했었고, 때로 교회 내의 갈등(행 6:1)과 신학적 논쟁(행 15:1-33)을 겪으면서도 부흥을 경험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부흥은 물리적·양적 확장만이 아니라 영적·내면적 성숙을 동반한 것이었다
1)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
신약에는 특정 지역의 교회들을 복수명사로 표시한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행 16:5; 고전 16:1; 고후 8:1; 갈 1:2, 22; 살전 2:14; 살후 1:4; 계 1:4 등). 이 본문에서는 세 지역(유대, 갈릴리, 사마리아)에 걸쳐 세워진 교회들을 단수명사로 표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주후 1세기 당시 유대와 갈릴리(서쪽) 지방은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유대인들과 전통적으로 반목하던 기피 지역이었다. 유대-사마리아의 민족적·종교적 갈등 속에서도 복음은 편만하게 퍼져나갔다. 이처럼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로 전파된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스데반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가 직면한 박해였다. 이 박해로 흩어진 성도들이 사마리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었고(행 8:1), 결국 복음 안에서 믿음의 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초대교회는 신분의 차이(ex. 주인과 종), 경제적 차이(부자와 가난한 자), 성별의 차이, 정치적 차이(ex. 셀롯인 시몬과 세리 마태), 민족적 차이(유대인, 이방인, 사마리아인), 종교와 지역의 갈등을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룬 '기적의 집단'이었다. 이처럼 진정한 부흥은 차별과 갈등을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다.
2)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사도행전 9:31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라고 기록한다. 우리말로는 '든든히 서가고'로 번역했지만, 이를 직역하면 '세워져 가면서'이다. 교회는 스스로 서 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져 가는 곳이다. 사도행전 9:31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설립과 부흥의 주체가 되심을 선언한다.
교회가 '평안'했음을 이야기한다. '교회는 진정 평안했는가?' 앞선 문맥에서(행 9:1-30) 큰 위협이 되었던 박해자 사울의 회심과 변화를 통해 교회가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에서 증가하다, 성장하다가 사용되는 전후 문맥을 보면, '박해' 또는 '갈등'이라는 주제가 함께 등장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6:1에서는 교회가 숫자적 성장을 이루면서 동시에 내부적으로 파벌 간의 '갈등'이 표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7 이후의 본문에는 스데반이 등장하면서 그의 '순교' 이야기가 전개된다. 12:24에 선행하는 본문에는 헤롯 아그립바(Herod Agrippa)의 주도로 야기된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내부의 갈등이나 외부의 박해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역사가 아니다. 성경적인 '평안'은 '아무 문제 없음'이 아니라 '문제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다.
3) 주를 경외함
사도행전 9:31 하반절은 '교회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라고 기록한다.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에는 '두려워하다'라는 하나의 동사로 번역되었다. '두려움', '놀람', '경외' 등의 뜻으로 사도행전에는 9:31을 포함하여 총 5차례 등장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막연한 '공포'가 아닌 '거룩한 두려움' 내지는 '영적인 충격'을 일으킨 사건들, 그리고 그로 인한 부흥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도행전 본문들은 교회의 부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령의 강림, 말씀의 선포,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현장에 거룩한 두려움과 충격이 임하였고, 이는 찔림과 회개 그리고 부흥의 역사로 이어졌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영적으로는 '거룩한 두려움'이 나타나야 하는 곳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의 권위나 힘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 그리고 거룩한 말씀에서 오는 하늘의 두려움이다.
4) 성령의 위로
끝으로 사도행전 9:31은 부흥의 원인으로 '성령의 위로'를 언급한다. 격려(encouragement), 요청(request), 위로(comfort, consolation)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이다. 보혜사로 번역된 '돕는 자(helper)', '위로자(comforter)', 또는 '중재자(intercessor)'의 뜻을 나타낸다. 성령님의 별명은 '위로자'이다. 그분은 우리를 곁에 부르셔서 위로하시는 분이다. 교회가 성령님 곁에 머무를 때, 교회에는 그분의 위로가 임하고, 수가 더 많아지는 부흥의 역사가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령님과 동행할 때 교회는 하늘의 위로와 부흥을 경험하는 곳이 된다.
부흥은 위로부터 오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하늘의 사건이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도전들이 있었으나, 교회는 성장했고 복음은 뻗어나갔다. 이처럼 부흥에는 인간의 한계와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책임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교회는 성령의 임재를 위해 기도하며, 거룩한 두려움을 회복하고, 찔림과 회개를 통한 영적 성숙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건과 교회의 성숙이 손을 맞잡을 때 교회에는 성령의 위로와 권능이 임하고, 한국교회는 다시 사도행전의 역사와 부흥의 계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김태섭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에스겔 37장 14절은 '마른 뼈들의 환상'으로 알려진 에스겔의 세 번째 환상 보도(37:1-14)를 끝맺는 마지막 구절이다. 에스겔의 세 번째 환상은 "여호와의 손(권능)이 내게 임하여"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네 개의 환상 이야기 (1:3; 3:22-27; 8-11장; 37:1-14; 40-48장) 가운데 하나이다. '마른 뼈들의 환상' 보도는 다음과 같이 네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 환상의 상황(1-2절), 2) 예언의 위탁(3-6절), 3) 예언의 실행(7-10절), 4) 환상의 해설(11-14절).
1) 환상의 상황(1-2절)
첫 번째 단락은 '환상의 상황'을 소개한다. 에스겔서는 에스겔 자신의 전기적 보도와 같다. 에스겔은 야훼의 '손'이 자신에게 임했다고 말한다. 이 '손'은 야훼의 힘과 능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우리말 성경에서는 '권능'으로 번역하였다. 이것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압도하는 힘에 사로잡혀 그러한 경험을 하게 되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야훼의 '영'이 함께 그를 이끌어간다. 야훼의 영이 에스겔을 이끌어간 곳은 '골짜기'였다.
에스겔이 야훼의 영에 의해 이끌려 간 그곳에는 뼈들이 가득하였다. 야훼께서는 그곳에서 에스겔을 뼈들 위로 이리저리 지나다니게 하셨다. 그것은 에스겔이 그곳의 뼈들을 자세히 관찰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죽임을 당한 자들'의 뼈들이었다(9절). 그것들이 나중에 회복되었을 때 '큰 군대(10절)'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뼈들은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뼈들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에스겔이 이끌림을 받아간 곳은 지난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전쟁터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정황을 생각하면 에스겔의 환상 보도는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역사적인 경험을 반영한다. 에스겔이 경험한 골짜기의 마른 뼈들은 에스겔과 이스라엘이 경험한 전쟁의 패배와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주전 587년 바벨론 느브갓네살의 침공시 죽은 사람들과 주전 722년 앗수르에게 패망당할 때 죽은 사람들의 뼈들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에스겔의 환상은 상징적이면서도 실제적이다.
2) 예언의 위탁(3-6절)
두 번째 단락은 '예언의 위탁' 장면을 보여준다. 주 야훼께서는 에스겔에게 물으신다. "인자야,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이것은 뼈들이 살아날 가능성에 대해서 묻는 질문이지만, 그 사실을 몰라서 하는 질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에스겔에게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신 32:39; 삼상 2:6; 또한 참조, 왕하 5:7)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를 보고자 하신다.
이때 에스겔은 "주 야훼여, 당신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한다. 인간의 무력성과 하나님의 가능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답변이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신다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이 가능성이 제로(zero)인 상황에서도 하고자 하신다면 그 일을 얼마든지 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이 6절에서 다시 한번 설명된다. 마른 뼈의 소생과 재생의 과정은 인체의 구조를 그대로 반영한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이 야훼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그 목적이 있음을 보여준다. 야훼께서 마른 뼈들을 살리시는 방법이자 도구는 '영'이었고, 그것의 결과는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이었다.
3) 예언의 실행(7-10절)
세 번째 단락은 '예언의 실행'을 보도한다. 에스겔은 주 야훼께로부터 명령받은 대로 예언한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에스겔의 절대적인 믿음을 보여주는 행동이다. 세 번째 단락은 '예언의 실행'을 보도한다. 그런데 그것들 속에는 '영'이 없었다(8절). 여기에서 소생과 재생의 과정이 일시 정지된다. 그리고 야훼의 말씀이 다시 한번 나타난다(9절). 이제는 '마른 뼈들'이 아니라 '영'에게 예언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환상보도에서 핵심어로 나타나는 히브리어 낱말 '루아흐'가 얼마나 다양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루아흐'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으며, 사방에서 불어오는 '영'을 묘사할 때도 사용된다. 그러니까 '루아흐'가 의미하는 다양한 의미, 즉 바람, 방위, 호흡, 영의 다양한 의미가 동시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창조의 영이시며, 동시에 '생명의 영'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에스겔은 야훼께서 명령하신 대로 예언한다(10절). 그러자 '영'이 새로운 꼴을 갖춘 몸들에 들어가 그들이 살아난다. 그러자 그들은 이제 누구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발로 서게 된다. '매우' 마른 모습으로 '매우' 많았던 '뼈들'이 이젠 '매우 매우 큰 군대'가 된 것이다.
4) 환상의 해설(11-14절)
네 번째 단락은 '환상의 해설'이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설명이다. 야훼께서는 먼저 뼈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말씀하신다(11절). 그것은 '이스라엘 온 집'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뼈들로 표현된 이유를 설명하신다.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죽은 자'로 남아 있는 '이스라엘 온 집'을 위해서 예언하라고 하신다(12절).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이 무덤을 열고 올라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이스라엘 땅으로 이끌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회복의 마지막 단계는 '나의 영'을 너희 속에 두는 것이다(14절). '야훼의 영'이 그들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그들이 '살아나게' 된다. 그들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땅에 들어가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너희가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주인이 누구이시며, 생명의 주인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하는 것이다. 이 모든 말이 야훼 자신이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증하는 것이다.
제109회 총회주제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이다. 이 주제는 대조되는 두 주체가 명시되어 있다. 그것은 '성령'과 '교회'이다. 이 두 주체는 각각 설명하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부흥'이다.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흥의 원동력이 성령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주제를 잘 뒷받침하는 것이 에스겔의 세 번째 환상 보도이며,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에스겔 37장 14절이다.
위의 본문 연구를 통해 우리는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되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의 세 가지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성령은 '생명의 영'이시라는 사실이다. 둘째, 성령은 '창조의 영'이시라는 사실이다. 셋째, 성령은 '지혜의 영'이시라는 사실이다. 에스겔의 세 번째 환상 보도와 유사한 주제를 담고 있는 본문이 에스겔 36장이다. 하나님의 영을 통한 이스라엘 회복과 갱신에 대한 예언이 소개된다(36:16-38). 이 가운데 회복의 마지막 단계로서 "내 영을 너희 속에 둔다"라는 내용이 에스겔 37장 14절과 동일하게 나타난다. 에스겔 37장 14절에서 약속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 자신들의 땅에서 거주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약속의 땅'인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가 지속적으로 살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게 하시는 지혜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하경택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신약 주제 성구 해설 사도행전 9장 31절
1)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
신약에는 특정 지역의 교회들을 복수명사로 표시한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행 16:5; 고전 16:1; 고후 8:1; 갈 1:2, 22; 살전 2:14; 살후 1:4; 계 1:4 등). 이 본문에서는 세 지역(유대, 갈릴리, 사마리아)에 걸쳐 세워진 교회들을 단수명사로 표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주후 1세기 당시 유대와 갈릴리(서쪽) 지방은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유대인들과 전통적으로 반목하던 기피 지역이었다. 유대-사마리아의 민족적·종교적 갈등 속에서도 복음은 편만하게 퍼져나갔다. 이처럼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로 전파된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스데반의 순교와 예루살렘 교회가 직면한 박해였다. 이 박해로 흩어진 성도들이 사마리아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었고(행 8:1), 결국 복음 안에서 믿음의 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초대교회는 신분의 차이(ex. 주인과 종), 경제적 차이(부자와 가난한 자), 성별의 차이, 정치적 차이(ex. 셀롯인 시몬과 세리 마태), 민족적 차이(유대인, 이방인, 사마리아인), 종교와 지역의 갈등을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룬 '기적의 집단'이었다. 이처럼 진정한 부흥은 차별과 갈등을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다.
2)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사도행전 9:31은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라고 기록한다. 우리말로는 '든든히 서가고'로 번역했지만, 이를 직역하면 '세워져 가면서'이다. 교회는 스스로 서 가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져 가는 곳이다. 사도행전 9:31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설립과 부흥의 주체가 되심을 선언한다.
교회가 '평안'했음을 이야기한다. '교회는 진정 평안했는가?' 앞선 문맥에서(행 9:1-30) 큰 위협이 되었던 박해자 사울의 회심과 변화를 통해 교회가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에서 증가하다, 성장하다가 사용되는 전후 문맥을 보면, '박해' 또는 '갈등'이라는 주제가 함께 등장하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6:1에서는 교회가 숫자적 성장을 이루면서 동시에 내부적으로 파벌 간의 '갈등'이 표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7 이후의 본문에는 스데반이 등장하면서 그의 '순교' 이야기가 전개된다. 12:24에 선행하는 본문에는 헤롯 아그립바(Herod Agrippa)의 주도로 야기된 야고보의 순교와 베드로의 투옥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초대교회의 부흥은 내부의 갈등이나 외부의 박해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역사가 아니다. 성경적인 '평안'은 '아무 문제 없음'이 아니라 '문제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다.
3) 주를 경외함
사도행전 9:31 하반절은 '교회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라고 기록한다. 우리말 개역개정 성경에는 '두려워하다'라는 하나의 동사로 번역되었다. '두려움', '놀람', '경외' 등의 뜻으로 사도행전에는 9:31을 포함하여 총 5차례 등장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막연한 '공포'가 아닌 '거룩한 두려움' 내지는 '영적인 충격'을 일으킨 사건들, 그리고 그로 인한 부흥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도행전 본문들은 교회의 부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령의 강림, 말씀의 선포,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는 현장에 거룩한 두려움과 충격이 임하였고, 이는 찔림과 회개 그리고 부흥의 역사로 이어졌다.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영적으로는 '거룩한 두려움'이 나타나야 하는 곳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의 권위나 힘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다. 성령의 임재와 역사 그리고 거룩한 말씀에서 오는 하늘의 두려움이다.
4) 성령의 위로
끝으로 사도행전 9:31은 부흥의 원인으로 '성령의 위로'를 언급한다. 격려(encouragement), 요청(request), 위로(comfort, consolation)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단어이다. 보혜사로 번역된 '돕는 자(helper)', '위로자(comforter)', 또는 '중재자(intercessor)'의 뜻을 나타낸다. 성령님의 별명은 '위로자'이다. 그분은 우리를 곁에 부르셔서 위로하시는 분이다. 교회가 성령님 곁에 머무를 때, 교회에는 그분의 위로가 임하고, 수가 더 많아지는 부흥의 역사가 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성령님과 동행할 때 교회는 하늘의 위로와 부흥을 경험하는 곳이 된다.
부흥은 위로부터 오시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하늘의 사건이다. 초대교회에는 많은 도전들이 있었으나, 교회는 성장했고 복음은 뻗어나갔다. 이처럼 부흥에는 인간의 한계와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회의 책임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교회는 성령의 임재를 위해 기도하며, 거룩한 두려움을 회복하고, 찔림과 회개를 통한 영적 성숙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건과 교회의 성숙이 손을 맞잡을 때 교회에는 성령의 위로와 권능이 임하고, 한국교회는 다시 사도행전의 역사와 부흥의 계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김태섭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