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신호를 가졌는가?

긍정의 신호를 가졌는가?

[ 주필칼럼 ]

김보현 목사
2021년 12월 29일(수) 15:18
김보현 목사
반가운 사람을 만날 때면 의도치 않게 '가위 바위 보'를 교환하게 된다. 악수를 해야 할지, 주먹을 마주쳐야 할지 신호가 엇갈린 탓이다. 반가운 이를 만나면 멀리 다가올 때 주먹부터 내밀며 다가오는 것 또한 이런 작은 혼란을 막고자 하는 배려(?)이다. 코로나 이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새로운 인사 문화가 자리 잡은 것이다.

서양의 인사법 악수와 군인들의 거수 경례 역시 그 기원이 법보다 총과 칼이 앞서던 시기 자신의 '비무장'을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코로나의 위세에도 지난해에 이어 신년 벽두부터 여러 선택과 선거를 위한 뉴스들이 뻬놓을 수 없는 관심사가 되고 있다. 민주주의 꽃이라 하는 선거를 앞둔 우리의 현실을 보면 제도와 절차, 법은 존재하나 이 모든 것 속에 부정적 신호가 충만함을 경험한다. 유세는 비방으로 바뀌었고, 검증은 가짜 뉴스와 인신공격으로 오염되어 버리는 경우를 일상으로 경험한다.

영국을 찾는 사람들이 차에 오르면 운전자에게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 중에 하나가 오른쪽 운전대에 대한 것이다. 실상 유난히 좁은 영국의 국도를 달리다 보면 한국에서는 늘 여유 공간이었던 오른편쪽으로 맞은편 차가 달려들 때마다 번번이 마음을 졸이곤 했다.

오른편과 왼편이 뒤바뀐 운전 환경, 오래되고 좁은 동네길 양 옆으로 주차된 차량들에도 불구하고 낯선 땅에서의 운전이 은혜로웠던 이유는 뜻밖에도 '쌍라이트' 의미의 새로운 발견 덕분이었다.

상향등(上向燈) 혹은 하이빔(High Beam)이라는 정식 표현보다 속칭으로 더 자주 사용되는 '쌍라이트'는 마주 오는 차량, 뒤따르는 차량, 누구에게서 주어지든 매우 불편하고 위험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야간 운전에 필수적인 전조등에는 실상 수많은 배려가 담겨 있다. 차량의 높이 크기와 관계없이 대부분의 차량은 전방 3,40미터까지 불빛이 이르도록 각도가 조절돼 있다. 뿐만 아니라 오른편 운전대를 채용한 국가의 차량들은 전조등의 왼편으로 살짝 꺾어져 있어 길가를 향하게 되어 있다. 영국과 유럽 대륙을 오가는 차량들은 반드시 사전에 빛을 반대로 굴절하는 스티커를 전조등에 부착하도록 의무화 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도로에서 경험하는 '쌍라이트'는 긍정보다는 부정, 배려보다는 '보복'과 '경고'의 신호로 사용되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도로교통법상에도 부적절한 상향등 사용은 등화조작에 대한 규정 위반으로 단속의 대상이 된다. 중국의 한 지역 공안 당국은 한 때 상향등 남발 운전자를 단속, 과태료 부과는 물론 논란 속에도 1분간 순찰 차량의 상향등을 강제로 바라보게 하는 처벌을 시행하기도 했다.

우리 도로에서도 한 때 후미진 곳에서 잠복근무 중인 교통경찰의 존재를 반대편 운전자에게 알리기 위한 신호로 상향등이 사용되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영미권, 심지어 일본에서도 상향등이 배려와 감사의 신호로 사용되고 있다.

비보호 좌회전을 기다리는 차량에게 허용의 신호로, 좁은 길을 교행할 때 먼저 와도 좋다는 뜻으로, 심지어 어둠으로 손인사를 전할 수 없을 때 배려를 받은 뒤 감사의 뜻으로 짧게 상향등이 사용되곤 한다.

이렇게 좋은 의미, 긍정의 신호를 우리 도로에서 사용하고자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신호와 의미이 해석이 뒤바뀌게 되면 혼란은 불을 보듯 한 일이다. 우리에게 긍정의 신호가 점차 줄어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고도 불행한 일이다.

어둠을 향해 '빛이 있으라' 선포하셨던 이상의 긍정의 메시지는 없을 것이다. '내게 절하라'는 시험하는 자에게도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응답하셨다. 기준은 복음이요 말씀이다. '세상을 염려하던 교회가 세상의 염려를 받게 됐다'는 개탄에 앞서 다시 한번 복음의 기준으로 우리가 오늘도 나 자신과 이웃, 사회를 향해 던지고 있는 신호를 돌아볼 때이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풍성한 긍정의 신호를 갖고 있는가.



김보현 목사 /총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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