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진리 문제: 시게루스 대 에티엔 탕피에

이중진리 문제: 시게루스 대 에티엔 탕피에

[ 인문학산책 ] 28

안윤기 교수
2021년 08월 24일(화) 13:12
중세 파리 대학에서는 신학부가 가장 중요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많은 논란을 낳은 조직이 인문학부였다. 인문학부는 원래 학생의 기초 교양과목을 수업하며 신학, 법학, 의학의 상급학부로 진학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12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대한 저작이 서방세계에 알려지면서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즉 자연 세계를 다룬 과학을 공부하는 학부로 성격이 바뀌었다. 그것도 아베로에스(Averroes, 1126~1198) 같은 이슬람 주석가의 도움을 받으면서 말이다.

특히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은 시게루스(Sigerus de Brabantia, 1240~1280)였다. 오늘날 벨기에의 일부인 브란반트 지방 리에주 출신인 그는 1260년경 파리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며, 60년대 후반에는 인문학 교수가 되었고, 특유의 저돌성과 인간적 매력으로 인문학부 안에 큰 세력을 형성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유롭게 가르쳤으며, 굳이 그의 이론을 기독교 교리와 조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예컨대 "세계와 인류는 영원하고", "자연 사물의 운동은 그것이 본성적으로 가진 법칙에 의해 지배되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필연성에 의해 제한되고", "모든 사람은 단일한 능동 지성 원리를 공유한다"는 것을 가르쳤는데, 이것은 교회의 가르침과 정면충돌하지만 시게루스는 개의치 않았다. 물론 시게루스도 "철학의 결론이 신앙의 결론과 상충한다면, 교회의 교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한다"고 말은 했지만, 그다지 책임감 있는 발언이 아니었다. 시게루스를 포함한 인문학부 교수들은 신학자가 고민할 문제에 굳이 자신들이 답변할 책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는 정통신조를 고백해도 학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과학에 충실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오늘날 기독 학생이 인류의 기원에 대해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의 창조를 고백하지만, 학교에서는 다윈의 진화론을 배워서 시험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과 흡사했다.

시게루스.
이것이 이중진리의 문제였다. 시게루스와 다키아의 보에티우스(Boethius de Dacia, 1240~1284) 등은 자신들의 입장이 신학부에서 상당한 권위를 누리던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과 유사하다고 주장하여 비난을 모면하려 했다. 토마스도 자연과 은총의 두 영역을 구별한 후, 자연 영역에 자율권을 부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의 이중진리 주장을 단호히 배격했다. 그런 주장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것으로서, 사람을 이중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일차적으로는 이성의 힘으로 진리를 파악하려 하고, 도저히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 즉 거짓이거나 불가능한 경우에만 신앙의 도움을 받으라는 것인데, 그런 태도는 결국 신앙이 무식하고 맹목적인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라는 그릇된 이미지를 낳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인문학자들이 전파하는 급진적 학문이 교회의 가르침을 침해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자, 파리 대주교인 에티엔 탕피에(Etienne Tempier, 1210~1279)는 철퇴를 꺼내 들었다. 1270년 12월, 파리대학에서 문제 있는 13개 학설을 가르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거기에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공유되는 하나의 지성이 존재한다", "죽음 이후 육체와 분리된 영혼은 형벌을 받지 않는다" 같은 아베로에스의 영혼론, "인간 행위는 신의 섭리와 무관하게 본성에 따라 이루어진다"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최초의 인간이란 없다" 같이 교회의
탕피에.
가르침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주장이 포함되었다.

1272년에 열린 인문학부 학장 선거에서 시게루스를 반대하던 보수세력이 이기고, 새로 선출된 학장은 "교수는 함부로 신앙과 어긋나는 내용을 가르칠 수 없다"는 조례를 채택했다. 그러자 시게루스를 추종하던 급진세력은 그 조례의 적법성을 문제 삼았고, 이후 거의 3년간 파리대학 인문학부는 파행을 겪게 된다. 그러다가 교황의 특사가 와서 보수세력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고 시게루스와 그의 동료들은 파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고, 어떤 이는 이단 재판을 받기도 했고, 시게루스는 조용히 지내다가 1284년경 정신이상에 걸렸다고 전해지는 비서에 의해 살해되었다.

1277년에 탕피에는 교황 요한 21세의 편지를 받았다. "파리대학에서 신앙을 해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있는데, 이를 조사해 달라는 서신이었다. 탕피에는 대규모 조사단을 구성하고 7년 전보다 더 철저히 조사해서 219개의 명제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끔찍한 이단 사설을 가르친 교수 몇 명을 고발했는데, 그들이 "마치 진리가 이중적이고, 성경의 진리가 이교도들이 말하는 진리와 모순되는 것처럼 가르쳤다"고 비난했다. 이런 거짓 명제를 가르치지 말라고 탕피에는 명령했고, 또 그런 것을 가르쳤거나 배운 사람도 일주일 내로 자수해 적절한 처벌을 받지 않으면 모두 파문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탕피에는 심지어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도 공격했는데, 그가 궁극적으로 원했던 것은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르침이 자연철학보다 월등히 우월함을 보이는 것이었다.

엄청난 교권의 위협 앞에 파리대학은 얼어버렸다. 최신 지식을 기반으로 거침없이 주장을 펼치던 이들이 패퇴하고 보수세력이 승리했다. 그러나 무엇이 승리인가? 시게루스와 동료들은 이교도가 아니었다. 그저 새로운 지식에 매료된 사람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보수세력은 그들을 교회 밖으로 내쫓았다. 1277년 이후 이성과 신앙은 분열되기 시작했다. 신학과 철학의 허니문은 끝났다. 그리고 교회 밖으로 내쫓긴 이들의 정신은 한 세대가 지난 1320년대에 다시 등장해서 이성과 신앙,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며, 한 시대를 주름잡던 중세 교회 질서를 뒤흔들게 된다.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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