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신학의 꿈: 보나벤투라 대 토마스 아퀴나스

자연신학의 꿈: 보나벤투라 대 토마스 아퀴나스

[ 인문학산책 ] 27

안윤기 교수
2021년 08월 11일(수) 08:39
보나벤투라(좌), 토마스 아퀴나스(우).
환우를 심방하거나 나 자신의 병 치료를 위해 약을 복용할 때 우리는 "이 약을 통해 주님이 치료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런데 어떤 병에 어떤 약이 치료효과가 있는지 여부는 '의학' 지식에 속하기에, 주님이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역사하셔야 하는지가 불분명하다. 치료의 인과관계는 공장에서 기계를 돌릴 때 동원되는 지식과 다를 바 없는 과학 지식이고, 과학 설명에는 굳이 주님이 등장할 필요도 없이 자연 세계가 자체적인 인과 메카니즘에 의해 돌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도 많지만, 역사를 볼 때 분명 과학은 그 지경을 점점 넓혀왔고, 유감스럽게도 이에 반비례하여 신적 개입의 여지는 위축되었다. 그래서 언제고 자연 내재적인 인과법칙으로 모든 것이 다 설명된다면, 굳이 하나님이 세상 일에 간섭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우리가 믿고 섬겨야 할 이유도 없는 분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과학으로 대표되는 세상 학문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관계를 잘 따져 보아야 한다.

12세기에 서구 사회는 크게 동요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대한 지식 체계가 새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 년 넘게 땅속에 감춰있던 보물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요소도 있었다. 특히 '형이상학'에서 이야기하는 '세계의 영원성' 테제는 창조 신앙과 도저히 양립될 수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통일성 있고 합리적이며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창조자 하나님 덕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우주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그렇게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신을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라고 부르며 인정했지만, 그가 말하는 신은 우주를 초월한 분이 아니라 우주 속의 일원인 뿐이며, 그저 자기 자신만 의식하고 인간과 세상사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어서 어떤 개입도 하지 않으며, 인격성도 갖고 있지 않다. 이처럼 껄끄러운데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른 현상들은 기막히게 잘 설명해 주고 있어서, 중세 기독 지성인은 그의 이론을 취사선택 하거나, 모종의 해법을 통해 교회의 가르침과 조화시켜야 했다.

프란체스코 수도사이면서 파리 대학 신학과 교수였던 보나벤투라(Bonaventura, 1221~1274)는 "신이 만물의 원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사물은 신의 개입 없이 작용하는 자체 원인과 결과를 가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주장을 인정하면 결국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사유가 진행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나벤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 중 일부를 수정하여, 결국 "하나님이 모든 자연 사건에 직접 관여한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러니까 각 사건이 일어나는 자연적 원인 배후에 신적 원인이 동시에 능동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을에 나뭇잎에 단풍이 드는 현상을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뭇잎의 형상, 즉 자체 본성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보나벤투라는 그 나무의 질료 안에 하나님이 부여한 '종자적'(seminal) 성향 때문이라고 했다. 또 '세계의 영원성' 주장은 '비합리적'이라고 부정했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재해석하거나 취사선택하여 그는 신학과 과학 사이의 민감한 대립을 우회하는 절충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파리 대학 신학과 교수이면서 도미니쿠스 수도회 소속이었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보나벤투라의 이런 시도를 못마땅해 했다. 이건 과학과 신학 모두에게 해가 된다는 것이다. 토마스가 볼 때 자연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은 적절했다. 비록 그가 자연 본성에 따라 성장하는 만물이 결국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는 피조물임을 깨닫지 못했지만 말이다. 하나님은 과거의 한 시점에 만물을 창조하고 이제는 뒷방으로 물러나 계신 분이 아니다. 창조는 지속한다. 피조 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와 시간 속에 존재하는 자연 사물의 자체 인과성은 양립가능하여 아무 모순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100% 과학자의 자세로 자연을 연구하면서도, 여전히 전통적 신앙 안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은총은 자연을 포기하지 않고, 도리어 자연을 완성시킨다." 그래서 토마스는 세상 학문을 적극 수용한 '자연신학' 분과를 새로 만들었는데, 이에 따르면 ① 무로부터의 창조, ②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③ 인간 구원에 있어 그리스도의 역할, 이 세 가지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 예컨대 하나님의 존재, 전지성, 선하심, 불멸성, 완전성 등의 교리는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 혹시 성경을 통한 계시가 없었더라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도덕규범을 알 수 있고, 구원에 필요한 지식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보나벤투라와 토마스의 차이는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있었다. 둘 다 세상이 피조물일 뿐임은 인정했지만, 토마스는 세상이 어느 정도 자체 질서를 가진다고 보았고, 보나벤투라는 세상이 철저히 하나님께 의존한다고 보았다. 토마스가 볼 때 보나벤투라의 말대로 하면 자연의 자율성이 침해되어서, 결국 세상 학문의 성과를 그리스도인이 멀리하게 되고, 이것은 그들의 세상살이를 위해서나 신학 발전을 위해서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연신학을 통해 과학 발전을 적극 수용하면서도 기독교 신앙과 양립 가능한 방법을 제시하려 했다. 반면에 보나벤투라는 자연신학을 거부해 과학의 기세를 어느 정도 제한하고, '하나님이 만유의 주되심'과 '세상의 전적 의존성'을 강조하려 했다. 이 두 입장은 오늘날 우리가 과학을 바라보는 두 가지 입장(신뢰와 의혹)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안윤기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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