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도회가 다문화가정과 함께하기 위한 제언

여전도회가 다문화가정과 함께하기 위한 제언

[ 여전도회 ] 교회여성과 계속교육원 完

한국기독공보
2020년 12월 23일(수) 07:10
ⓒ Unsplash
여전도회가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원칙과 주의점을 간단히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전문성 확보이다. 그동안 적지 않은 교회에서 다문화 가족을 위한 사역을 해왔지만 다소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둘째, 지속성 유지이다. 다문화 가족 사역에 있어서는 사전에 치밀한 준비와 계획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셋째, 방향성의 문제이다. 일방적 관점을 지양하고, 동화가 아닌 공존의 관점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넷째, 연계성 확보이다. 지역사회의 다양한 주체들(중앙부처, 지자체, 타 교회, 민간 복지단체, 인권단체 등)이 긴밀한 협조관계를 구축하고, 다원적인 협력체제 하에서 각자의 장점과 특성을 최적화시킨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시행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교회 내 교육이다. 다문화 가정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은 두 가지 방향에서 이뤄져야 한다. 하나는 기존의 교인들에 대한 교육이다(하나는 기존의 교인들에게 다문화 가정이나 다문화 정책 등에 관해 교육하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는 다문화가족 자녀와 부모를(대상으로 한국 사회에서의 적응을 돕기) 위한 교회교육이다. 여섯째, 실제로 다문화가족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편 인간은 세 가지 단계에서의 죄를 짓고 있다. 개인의 내면 단계, 인간 관계적 단계, 대사회적 관계가 그것이다. 개인의 내면 단계는 본능, 초자아, 자아로 구성돼 있는 개인의 죄이고, 인간 관계적 단계는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 야기되는 죄이다.

마지막으로 대사회적 단계는 사회, 국가, 세계의 구조에 존재하는 사회적 죄이다. 교회의 사회봉사가 필요한 영역은 이 세 단계의 죄 모두에 해당한다. 그 중에서도 한국교회가 특별히 취약한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대사회적 단계에 해당한다.

그레고리 바움은 대사회적 단계에서의 죄를 네 가지로 유형화했다. 첫째, 사회적 죄는 집단생활을 지탱하는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 혹은 그 밖의 여러 가지 제도에서 나타나는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은 취급에 의해 발생한다. 둘째, 사회적 죄는 문화적, 종교적 상징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은 무의식적으로 사회에 의해 조장되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죄는 제도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오해를 통해 생기는데, 마치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오해를 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적 약자에게 유해한 행위를 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죄는 집단 결정에 의해 만들어지고 비뚤어진 의식에 의해 만들어진다. 사회적 죄는 사회에 불공정을 증대시켜 비인간적인 권력을 강화한다.

위에서 살펴본 노인, 장애인, 다문화 가정은 약자들이며, 특히 한국사회에서 그 사회적 지위가 취약한 계층이다. 그들은 불공평하고 비인간적인 취급을 당하고,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상징에 의해 귀신에 씌었다거나 죄악에 물들었다는 모욕을 당하기 일쑤였고, 잘못된 제도나 사상의 이유 없는 희생자였으며, 집단적으로 만들어진 어긋난 오해의 피해자였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는 '교회는 수세기 동안 진리(윤리적 가치)를 이론화하는 것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세계를 개선해 가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여전도회는 이제 대사회적 단계의 죄에서부터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된 기원에 대해서 알려준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바울과 바나바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른 첫 부류는 이방인이었던 안디옥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안디옥에서 살았던 삶을 보고 안디옥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부른 것이다.

여전도회가 참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실천 공동체가 되는 것은 여전도회가 여전도회관에 모이기를 힘쓰고 우리 안에서 하는 많은 일들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는 우리가 하는 행동을 보고 우리 주변의 이웃들이 붙여주는 것이다. 21세기 여전도회의 봉사가 그리스도의 봉사인지는 여전도회 스스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도회의 봉사 대상과 그 주변의 이웃들에게 물어보아야 정확할 것이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