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교회 청년의 육필 일기

광야교회 청년의 육필 일기

[ 기독교문학읽기 ] 10. 맹의순, 십자가의 길

김수중 교수
2019년 09월 11일(수) 13:59
포로수용소 안에 광야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던 청년 맹의순(1926~1952)은 수용소에서 석방될 기회도 마다한 채 26년 8개월의 짧은 삶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의 고난과 헌신의 발자취는 약 20년 전 정연희 작가에 의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소설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2년 전에는 그가 수용소에서 쓴 육필 일기를 영인본으로 묶은 '십자가의 길'이 출간되었다. 그의 손글씨를 직접 대하는 독자들은 활자로 읽었던 전기와 다른 느낌 속에서 '잔'과 '십자가'를 함께 묵상할 수 있었다.

맹의순 선생의 삶은 몇 가지 점에서 시인 윤동주를 떠올리게 한다. 윤 시인의 삶도 불과 27년 2개월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던 신실한 크리스찬이라는 점, 아픈 역사의 현장인 일본 감옥과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각각 삶을 마감했다는 점 등이 그렇다. 그러나 그보다 더 깊은 공통성이 있다면, 두 분의 기품 있는 육필이 훗날 크리스찬들의 가슴에 영원히 새겨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글씨는 인격의 반영이다. 윤동주 시인이 남긴 글씨는 한 자 한 자 눌러쓴 모양이 참으로 반듯하고 정갈하다. 그가 추구한 장르가 시였기 때문에 글자마다 힘과 정성을 실었다고 볼 수 있지만, 청년이 이토록 흘림 없이 글씨를 쓴 것은 완벽을 추구했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난 결과라 하겠다. 반면에 맹의순 선생의 글씨는 보기 드문 달필로서 한자와 영문자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일기에는 사용하지 않았으나 일본어와 헬라어도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는 문학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 위해 일기를 썼으므로 비록 휘갈겨 쓴 글자라도 그 속에 배여 있는 진실함과 지혜로움을 숨길 수 없다.

문득 사도 바울의 옥중 편지, 그 육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사도는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고 또 시력마저 떨어졌으므로 대필하는 사람을 두지 않을 수 없었으나 문안 인사만은 꼭 자신의 친필로 써서 보냈었다. 감옥에서 쓰는 편지라서 필기도구나 종이도 변변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서신을 받아 보는 이들은 그 조악한 지필묵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친필에서 그리스도의 은총과 지혜를 느낄 수 있었다. 감옥과 다름없는 포로수용소의 거친 조건 속에서도 진실과 지성을 담고 있는 맹의순의 글씨가 그 옛날 사도 바울의 육필을 생각나게 한다.

그의 일기는 1952년 1월 1일부터 3월 26일까지 약 석 달 동안에 걸쳐 있다. 애석하게도 1월 14일 첫 줄 아래부터 19일까지의 일기는 유실되었다. 좌우익 간의 갈등과 대립이 한창일 때 일기 쓰기가 중단되었고 그해 8월에 그는 건강을 잃고 쓰러졌다. 이 기록은 수용소에서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십자가의 길로 향하는 맹의순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는 조선신학교에 재학하던 중에 한국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으로 오인한 미군에 의해 부산 거제리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이 짧은 일기에서는 그가 수용소 안에 세운 광야교회에서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봉사, 설교, 연구에 어떻게 매진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형제들을 향한 그리움,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감정을 믿음으로 초월하기 위한 노력,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무서운 음모와 폭력, 그리고 내부 갈등으로 인한 충격적 사건 등을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맹의순은 이런 부조리 앞에서 때때로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승리의 비결이 십자가라고 확신하였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희생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실천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 책은 맹의순의 일기 원본 사진과 현대어 번역, 그리고 그의 삶을 기록한 신재의 장로의 논문을 묶어, 맹 선생의 모교회인 남대문교회가 엮어냈다.



김수중 교수/조선대학교 명예, 동안교회 협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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