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효심

왕의 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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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숙 기자 ches@pckworld.com
2019년 07월 03일(수) 10:00
사도세자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고, 환궁한 후 10월 11일 정조는 수원부를 송추지향(松楸之鄕)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3읍 백성들에게 "이 고을은 바로 나의 조상이 묻혀 있는 고을이고 너희들은 이 고을의 백성이다. 나는 너희들을 한 식구처럼 여기면서 먹거리를 넉넉하게 하고 산업을 풍부하게 함으로써 생활에 안주하고 생업을 즐기는 방도를 얻도록 나의 책임을 다하고 나의 생각을 풀 수 있을 것이다"라고 유시하였다.

현륭원 부근 면리(面里)와 신읍치로 이사한 민인들에게는 가정의 세금을 면제해 주는 복호 10년을 내려줄 것을 지시하였으며, 수원 주민 중 사도세자의 온양 온천행시 오산 독산성에 머물 때와 이번의 정조행차를 맞이한 자 가운데 70세 이상의 조관(朝官)과 80세 이상의 사서(士庶)들에게도 가자(加資: 정3품 이상의 품계)를 올리도록 하였다.

정조는 현륭원을 만든 뒤 많은 특혜를 주었고, 본인은 매년 현륭원을 참배 수원부사(화성유수)로 하여금 정기적으로 제사를 치제(致祭)하게 하고 자세히 살펴보고 훼손하지 못하도록 했다. 화성을 축성하면서 여러 시설물의 지름을 지을 때도 효심을 담았다는 것이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방화수류정과 봉수당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에서 빼어난 외관과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는 건축물은 동북각루인 방화수류정이다.

방화수류정의 위치는 화성의 동북방면 용머리바위에 위치하고 있고 광교산의 한 쪽 기슭이 남쪽으로 뻗어 가서 선암산이 되었고, 다시 서쪽으로 돌아 몇 리를 가서 용머리바위에 멈추고서 북쪽으로 활짝 열려있다. 용의 여의주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연못이 용연(龍淵) 위에 불쑥 솟은 용두암에 이르면 산과 들판이 만나고 물이 돌아서 아래로 흘러 대천에 이르게 되므로 동북 모퉁이의 요처가 되어 이곳에 각루를 세운 것이 동북각루(東北角樓)이고, 각루는 전투를 지휘하고 적들의 침입을 관측하는 곳으로 이 각루에 걸려있는 편액이 방화수류정이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는 이름은 정조를 모신 자리에서 남인계 명재상인 채제공이 지은 것으로 화산(花山)과 유천(柳川)의 의미를 취한 것이다.

화산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곳이고, 그 남쪽에 유천이 있었기에 채제공은 방화수류정이란 이름을 짓고 정조는 그 이름의 편액을 길게 했으며, 겉으로 보기엔 화창한 봄날 꽃과 버들을 찾아가 노닌다는 의미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현륭원을 찾는다는 의미가 숨겨 있는 것이다.

방화수류정이 용두각(龍頭閣)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용머리 형상을 하고 있는 용두암 위에 지어진 건물이자 그곳에서 정조가 과거시험, 활쏘기 등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행사에서 기쁜 소식이 널리 펴졌기 때문에 수원 백선들은 용두각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것이다. 각(閣)이라는 이름이 붙는 건물은 왕실에서 주로 많이 쓰인 곳은 널리 소식이나 배움을 알리는 용도의 건물에 쓰이는 이름이었으며, 보신각은 날이 바뀌고 해가 바뀌는 것을 알리고, 규장각은 배움을 알리는 곳이었기에 각(閣)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것이다. 화성의 기본설계는 다산 정약용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동북각루의 건립은 정조가 화성축성기공식에 참석한 이후 화성건립 예정지를 순행 중 용두암 일대가 중요한 전략적 위치라고 판단하여 건립을 지시하여 이루어졌다.

화성행궁의 정당인 봉수당(奉壽堂)의 이름은 가장 대표적인 효심의 표현이다. 원래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고, 이것은 남쪽을 장대하겠다는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의미로써 지극한 효심이 담겨 있다. 또한 혜경궁이 왕후와 같은 존재이기를 바라는 마음 화성행궁의 침소를 장락당(長樂堂)이라 한 것이다. 세자빈으로 왕비가 되지 못한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정조의 눈물겨운 정성이 담긴 것이다. 백성들 사랑하기를 제 몸처럼 하신 국왕으로 부모님을 사랑하고 받들어 모시는 효심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

조희석 집사/수원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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