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를 귀하게 여기자

공동체를 귀하게 여기자

[ 주간논단 ]

차주욱 장로
2019년 05월 14일(화) 10:00
삼강오륜에 길들여진 옛 사람들은 충효를 으뜸으로 삼았다. 가문의 명예 앞에 개인은 없었고 장손을 위한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다. 가난과 질고도 기구한 운명으로 알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조선중기 인구의 30~40%에 달하였던 노비제도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근본적인 체제를 바꾸지 못했다. 그대로 두었더라면 노예사회가 오래 지속되었을 터인데 대한민국은 여러 면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었다.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임금도 친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민족의 제단 앞에 쉰 세 살 아까운 생을 바친 이순신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특별한 사랑의 선물이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하여 천하보다 귀한 목숨도 기꺼이 드린 신앙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공동체를 위한 헌신과 희생을 당연하게 여겨왔으나 어느새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왔다. 리더십이 바뀌고 교육 사회 환경이 변했다. 인간의 기본권이 대두되었다. 공동체가 지향하는 지원 협력 협동 결속 내부적 유대가 무너지게 되었다.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개별 또는 집단네트워크가 형성됨에 따라 또 다른 소외자가 생겨났다. 인권 앞에 무슨 반론이 필요하며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는데 무슨 명분이 필요하겠는가? 소수자들도 참는 것만이 미덕이 아니라 정당하게 의사를 표시하고 권리를 찾는 것이 당연한 때가 되었다.

공동체를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오랜 기간 헌신했던 이들의 입지는 좁아지게 되었다. 개인을 위하여 공동체가 존재하는 시대이다. 교회도 변하고 있다. 사회가 교회에 영향을 끼치려 하지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 있는 교회는 많지 않아 보인다. 누구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한다. 나의 성공과 나의 즐거움과 나의 편안함을 위해서는 남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 살아간다. 기도하고 사랑을 노래하지만 울리는 꽹가리가 많다. 타인의 감정에는 무감각하고 내 느낌에 우선하면서도 배려해 달라고 소리를 높인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이를 위하여 치유사역과 중보기도를 하지만 사실은 자신이 감정 장애인이 된 것을 모르는 경우도 많다. 회칠한 무덤이 자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공동체는 개인을 무시하지 말아야 하지만 개인도 공동체를 존중히 여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갈등과 분쟁은 필연적이다.

우리는 교단의 정체성을 지키고 힘을 모아 복음전파에 전념해야 한다. 시대적으로 해야 할 일은 많은데 기도하는 한국교회가 어떤 기도를 어떻게 드리고 있는지 지도자들은 겸허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 평신도들과 눈을 마주쳐야 한다. 평신도들이 어떤 눈으로 어떤 모양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지도자들을 보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일단 문제를 제기하고 보자는 것은 성숙한 자세가 아니다.

총회는 기본직무와 함께 교회가 대처하기 어려운 해외선교, 이단, 연합사업, 평화통일, 세금, 동성애, 낙태, 대사회, 대정부 문제 등 공동체를 보호하고 구성원의 신앙을 지키기 위한 일을 한다. 교단을 폄하해서는 안된다. 자신의 뜻과 다르더라도 리더십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스스로 존중함을 받을 것이다. 이제는 절제해야 할 때다. 총회를 위하여 일하고 싶은 유능한 인적자원은 많으나 한 두 번 총대가 되었다고 마음대로 하기는 쉽지 않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3년 정도씩 배려한다면 다소 총회를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외국의 어느 회의 진행을 유심히 보았더니 스크린에는 의안과 의장의 화면만 뜨고 총대의 발언 시에는 잔여시간만 나타날 뿐 발언자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우리도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때일수록 공동체를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시대는 곧 변하게 되는 것이니 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도록 성령이 주시는 지혜가 필요하다. 먼저 웃으며 내미는 손이 그립다.



차주욱 장로 부총회장/제천명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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