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체제 극복은 '3.1 혁명'의 완성

분단체제 극복은 '3.1 혁명'의 완성

[ 특집 ] '상해임시정부 100주년, 그 의의와 우리의 과제'(4월 특집) 1.임시정부 100주년의 역사적 의의

김승태 소장
2019년 04월 01일(월) 10:05
상해임시정부 청사
올해 4월 11일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3월 1일 손병희(孫秉熙)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발표한 독립선언과 우리 민족이 이에 호응하여 일으킨 거족적 만세시위의 직접적인 열매요 결과이다. 만세시위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줄기차게 이어졌지만, 임시정부 수립이 3.1운동의 결과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적 의의를 찾으려면 먼저 3.1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일제의 총칼 앞에 목숨을 걸고 맨손으로 평화적 만세시위를 벌인 역사적 사건이다. 시기적으로 좁게는 그해 5월 말까지, 넓게는 이듬해 3월 말까지, 공간적으로는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우리 동포들이 이주하여 살던 만주·중국·일본·미주·하와이·러시아 연해주 등 모든 곳을 포함한다. 시위 규모는 달랐지만, 그해 5월 말까지,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하더라도 1500여회가 넘었고, 참여한 연인원은 202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우리 인구가 1800만에서 2000만 명이었으니까 총 인구의 10%이상이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우리 민족은 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났다. 3.1운동의 결과 중국 상하이에서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고, 비로소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를 꿈꾸고 연습하게 되었다. 3.1운동이 '3.1혁명'으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가들은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불렀고, 3.1운동이 일어난 당시에도 북감리회의 웰치 감독(Bishop Herbert Welch)이나 캐나다장로회의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같은 선교사들도 이를 '한국 혁명(Korean Revolution)'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미완의 혁명이었다. '3.1혁명'에서 추구한 목표와 이념이 완전히 성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3.1독립선언서에 나타난 3.1운동의 이념 내지 정신은 크게 세 가지다. 자주독립(自主獨立, liberty and independence)·정의인도(正義人道, justice and humanity)·평등평화(平等平和, equality and peace)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 된 민족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결코 온전히 성취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인 민주화도 사회정의도 평화통일도 3.1정신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3.1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3.1운동의 이념인 자주독립 정의인도 평등평화는 자유 정의 평등 평화로 요약될 수 있고, 이것은 인류 보편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권리장전이자 인권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류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고나서야 1948년 12월 유엔(국제연합) 총회에서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의 전문에서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고유의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여할 수 없는 권리를 승인함은 세계에 있어서 자유 정의와 세계평화의 기본이 되는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이것을 우리 민족은 이미 그 30년 전인 1919년 3.1운동에서 천명하였고, 그 실현을 위한 행동에 자발적으로 거족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래서 3.1운동을 주동하거나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행동은 정의인도에 따른 정당한 것이며,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법정투쟁을 벌였다. 예를 들어 원산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던 이가순(李可順)은 당시 최고법원인 고등법원에 상고하는 상고취지에서 "나의 행위는 정의인도에 근거하고, 세계 대세에 따라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한 행위로 아무런 범죄행위가 아니다. 이는 인류의 공존권상 필연적인 요구로, 인류 양심의 자연적 발로로, 추호도 안녕질서를 문란시킨 일은 없다. 또 파괴 폭행 등 비행(非行)을 행한 일도 없다"고 주장했다.

3.1운동에 우리 민족 전 계층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참여하면서 그들의 의식이 변혁되었다. 전근대적 굴종의식이 사라지고, 근대적 권리의식, 저항의식, 시민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정치의식에서도 과거의 복벽주의(대한제국 재건)가 사라지고, 민주공화정(대한민국임시정부)을 수립하려는 의식이 지배하였다. 우리 민족 모두에게 나라와 민족에 대한 권리와 책임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3.1운동이 우리 민족이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난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크게 다음과 같은 3가지의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3.1운동의 이념 내지 정신을 기초로 수립된 근대 민족국가이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3.1운동의 이념 내지 정신은 자주독립, 정의인도, 평등평화이며, 이것은 인류 보편적 최고의 가치들이라고 할 수 있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것을 새로운 민족국가 건설의 기초로 삼은 것이다.

둘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비록 임시정부이기는 하지만, 우리 민족, 우리 국민이 주인이 된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국이다. 우리 민족은 1910년 8월 전제군주제였던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되어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우리나라의 국권(國權)이 대한제국의 황제에서 우리 국민에게 넘어온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점은 1917년 7월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발표한 '대동단결의 선언'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그래서 국민이 주인이 되어 국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을 건설한 것이다.

셋째,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고 계승 발전시키며, 동등하고 우호적인 국제협력과 세계평화를 지향하는 국민국가이다. 우리의 것을 존중하되 남의 것을 무시하지 않는, 우리의 자유를 지키되 남의 자유를 침탈하지 않는, 세계평화와 인류행복을 지향하는 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지향하였던 가치는 100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우리나라와 우리민족에게 이어지고 있다. 물론 이런 가치가 충분히 실현되려면, 자주적 민주화, 사회정의, 평화통일 등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가 산적해 있기는 하지만, 이 지향은 우리가 계승하여 완성시켜야 할 고귀한 가치인 것이다. 우리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김승태 소장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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