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 통일 위해 헌신

세계교회, 통일 위해 헌신

[ 통일을 위해 발로 뛴 사람들 ] 에큐메니칼 인사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교회 인사들 동참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9년 01월 04일(금) 14:56
도잔소25주년 예배 광경. 2009년 10월 국내 에큐메니칼 운동 관계자 50여 명과 세계 30여 국에서 참가한 에큐메니칼 운동 지도자 50여 명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함께 노력할 것을 다짐했었다.
도잔소 1세대들. 사진 왼쪽부터 고 오재식박사(WCC JPIC 전 총무), 강문규박사(WCC 전 공동의장), 박상증목사(CCA 전 총무), 박경서박사(WCC 아시아데스크 전 총무). 사진은 지난 2009년 도잔소 25주년 대회에서 함께 한 모습.
지난 한 해는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전환된 기념비적인 해였다. 그러나 남북 관계가 진전되기까지는 분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억압과 투옥, 고문 등을 당하면서도 평화의 길을 가야한다는 일념 하에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자신을 던졌던 이들의 헌신이 있었다. 통일운동에 있어서 기독교는 그 시작과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앞으로 마무리 역할까지 감당해야 할 중심에 위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일운동의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교회의 자체적 통일운동도 있었지만 해외거주 한국인들과 WCC 등 세계교회의 인사들의 헌신적인 노력도 컸다.

우선 통일운동에 있어 한국사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WCC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중앙위원회를 열고 있었고, 그 회의에서 곧바로 남한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해 유엔에서 구호품을 즉시 보낼 수 있도록 역할을 했을 정도로 한반도 갈등의 초기부터 평화의 사도로서 역할을 했다. 1980년대 남북관계가 닫혀 있을 때 한반도 밖에서 남측과 북측의 지도자를 불러 교류할 수 있게 했고, 이후에도 가교역할을 해왔다.

WCC와 세계교회에서 수많은 이들이 한국의 통일을 위해 뛰었지만 그중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WCC 총무를 지낸 필립 포터와 인도 출신의 나이난 코쉬 박사다.

지난 2015년 3월 별세한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필립 포터 박사는 1972년부터 1984년까지 WCC 총무로서 1975년 WCC 나이로비 총회에서 한국 문제에 대한 성명을 채택하도록 뒷받침했고, 1984년 일본 시즈오카현에 있는 YMCA수양관 '도잔소(東山莊)'에서 '동북아 평화.정의에 관한 국제회의'를 개최토록 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논의를 세계적으로 추진했다. 도잔소회의는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 한국교회와 해외교회가 본격적으로 머리를 맞댄 역사적인 모임으로 평가받고 있다.

나이난 코쉬 박사는 1984년 WCC 국제위원장으로서 도잔소 회의를 주도한 인물이다. 코쉬 박사는 도잔소 회의를 계기로 이듬해 WCC 사상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했으며, 1986년 북한교회가 참여하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독인협의회(글리온 회의)'를 성사시켰다.

한국교회에서 통일운동의 중심은 NCCK와 에큐메니칼 인사들이었다. 당시 통일운동은 민주화 운동과 상호 보완적인 성격을 띠며 진행됐다. 1982년의 NCCK 제31차 총회에서 '통일문제연구원 운영위원회'가 신설된 것을 계기로 화해와 공존으로서의 '민족적 자주통일' 논의가 활성화됐다.

통일운동에 힘쓴 이들을 일일히 다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1974년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WCDKㆍ후에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로 변경)' 명단에 주요 인사들이 거론됐다. 1975년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WCC 제5차 총회가 열리기 직전 11월6~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한국 문제에 관한 비공식 모임에서 세계교회 지도자들이 본격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한국 기독교인들이 조직을 만들어줄 것을 요청해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WCDKㆍ후에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로 변경)'가 결성됐다. 의장에는 김재준, 사무총장 지명관, 사무차장 겸 대변인 박상증, 회계 손명걸이 맡았으며, 중앙위원회 위원은 북미의 이상철 이승만 손명걸 김인식 홍동근, 일본의 오재식 지명관 김용복 최경식, 유럽의 박상증 ·장성환 이삼열 신필균, 한국의 이태영 강문규 등으로 구성했다. 당시 모임에 국내에 있던 김관석 안병무 문동환은 출국금지로 참석하지 못해 마음으로 함께 했다. 문익환, 강원용 목사 등은 통일운동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통일운동에 있어 기독청년학생들의 헌신도 빼놓을 수 없다. EYC와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의 학생들과 실무자들도 통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인물들을 길러냈다.

예장 총회에서는 1969년 남북한선교통일위원회가 고 한경직목사를 초대 위원장으로 발족됐고, 1971년 9월 제57회 총회에서 북한전도대책위원회로 설립됐다. 1991년 9월 남북한선교협력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1996년 9월 남북한선교통일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5년 이후에는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교단과 수많은 교인들이 힘을 모아 봉수교회 건립 및 다양한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펼쳤다. 이러한 북한 지원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통일을 위해 헌신한 이들이라 하겠다.


표현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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