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역시 하나님의 노래꾼

난 역시 하나님의 노래꾼

[ 4인4색 ] 박종호장로(12)

박종호
2018년 12월 05일(수) 15:23
24년전 겨울 1월이었다. 언제나처럼 수천명의 관객을 대상으로 대형 콘서트를 치르고 나면 나는 봉고차에 스피커들과 커다란 내 몸집을 싣고 강원도로 떠나 인제 원통 양구 거진 속초 주문진 태백 등 쉽게 찾아갈 수 없는 시골교회들을 찾아가 음악회를 열었다

기독문화를 세워보겠다고 대형 콘서트를 고집하고 공연이 끝나면 내게 닥쳐오는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빚으로 인해 돈에 대한 버거움이 느껴졌다.

이런 속상함 때문이었을까? 공연후 봉고차에 가득 실린 스피커와 찬양집회 준비물들과 함께 나는 마치 짐짝처럼 실려갔다.

시골 교회는 기독문화가 그리웠는지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가득 모여 마치 잔치집 같았다. 원통에 도착하자 교회 오르막이 얼어 빙판이었다. 봉고차는 그 무거운 스피커들을 싣고 올라갈 수 없어서 목사님이 지나가는 트렉터 운전자에게 도움을 요청해 겨우 10 미터도 안되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갈지자 모양으로 올라갔다. 연세가 많으셨던 목사님부터 아래로 주욱 미끄러지시면 우리 모두 함께 다시 기어오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두 시간이 훨씬 넘어서 간신히 스피커, 앰프들을 교회에 올렸다.

오가는 강원도 굽은 산길도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우리가 타고 있던 봉고차는 자주 미끄러져 천길 낭떠러지를 가로 막고 있는 가드레일에 부딪히기를 반복했다. 사실 진짜 순교자의 심정이 되곤 했다.

거진에서는 찬양예배가 끝나면 온 교인들이 장공순 집사님 댁으로 모여 명태국을 먹었었다. 교인 수십명이 모여서 그때부터 명태국을 끓이고 온교인들과 함께 자정이 넘도록 명태국을 먹던 그 명태국 거진 집사님들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10여 년 전 여름 미국 뉴욕에서 유학생 성악가 후배들과 함께 식사할 때의 일이다. 지금은 대학의 교수로, 미국의 유명 오페라 무대에서도 서며 완성도 높은 성악가로 활동하던 후배가 얘기해주었다.

"선생님 골프에는 '박세리 키즈'가 있듯이 저희는 '박종호 키즈'입니다."

이유인즉 교회학교 중등부시절 어느날 들려오는 박종호의 찬양 '여호와 우리 주여', '내가 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등을 따라 부르며 성악가로의 꿈을 갖고 노래공부를 시작하여 지금의 성악가로 자랐다는 것이다. 너무 뿌듯했다.

그리고는 사랑하는 후배들은 내 눈 앞에서 세계적인 목소리들로 어마어마한 오페라곡들을 불러주었다. 사랑하는 후배들의 노래에 눈물이 흘렀다. 마치 하나님이 위로해주시는것 같았다.

나의 옛적 찬양을 듣고 노래를 시작한 후배들이 이제는 세계적인 성악가들로 활동하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지금도 건너건너 듣곤 한다. 후배들이 고마웠고 너무 자랑스럽다.

일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어느덧 31년이 지나간다. 참 많은 일들이 스쳐간다.

1999년 문득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리의 정점을 보고싶다는 소원으로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고별콘서트를 마치고 원하던 뉴욕의 대학원 과정에 멋진 소리로 합격을 앞두고 새벽 추운 겨울 뇌졸증 증세로 쓰러졌다. 이 소식이 알려져서 그때도 수많은 분들의 기도로 세시간도 안되어 회복되었다. 그해 지금은 천국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있을 사랑하는 친구 상우와 함께 발표한 노래가 '하나님의 은혜'다.

겁도 없이 그냥 내 혈기로 그저 최상의 문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만 달려왔을 뿐인데 이 모든 것이 그저 다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돌아보게 하셨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일방적인 은혜이심을 잊지 말자고 날마다 날마다 고백한다. 나는 그저 그 철없던 열심을 냈을 뿐이었는데 하나님은 훨씬더 아니 표현할 수 없는 더욱 깊고 깊은 은혜로 멋지게 하나님의 일을 이루셨다.

그리고 다짐해본다. 나는 지금도 그 은혜만을 기억하고 정말이지 잘, 아주 잘 그 하나님을 멋지게 노래하고 싶다. 난 역시 하나님의 노래꾼인 것이다.

박종호 장로/CCM 사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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