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신이 하나님 뜻대로 전개되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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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플러스 ] 신학과 문학의 만남

김수중 교수
2018년 10월 26일(금) 10:53
김수중 교수
문학은 무엇이며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근원적인 질문이 있다. 이 해묵은 물음에 대한 대답은 시대와 관점에 따라 매우 다양하여, 상상의 힘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모호한 결론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답변은 문학이란 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문학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삶과 정신을 존재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가 배어 있다. 인간을 만드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이 신학이다. 결국은 인간이 있음으로써 문학과 신학이 존재할 수 있다. 인간을 매개체로 하여 문학과 신학은 서로 만나고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나 이 사이에서 매개의 구실을 하는 인간들은 오히려 두 학문을 갈라놓고 만남을 방해하려 들었다. 인간은 문학의 힘으로 만들어질 수 없으며, 인간의 힘으로 신학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주장이나 의지가 작동한 것이 그 이유가 된다. 어쩌면 두 개의 학문을 별도로 떼어놓는 것이 인간 탐구에 더 편리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문학의 정의는 여러 각도에서 다른 견해가 나와 있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를 통해 인간 정신을 표현하는 학문이나 예술의 형태라고 하는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상상, 언어, 인간 정신이 문학을 형성하는 요건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문학의 요소들이 신학과 능동적인 만남을 이루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먼저, 문학적 상상은 진실이 아니라 허구(fiction)이므로 문학은 결국 거짓의 포장일 수 있다는 논리다. 신학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진리를 선포하고 변증하는 기능을 갖는다는 점을 내세운다. 문학에서의 허구가 배제된 만큼 신학의 변별력이 높아진다는 주장과도 일치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문학이 가진 기능, 곧 교시적 기능과 쾌락적 기능 가운데서 사람에게 기쁨이나 재미를 주는 쾌락적 기능을 경계했다. 그렇게 되면 문학의 교훈성만이 신학과의 대화 채널로 남을 수밖에 없는데, 도리어 문학에서는 글이 지나치게 교훈적으로 흐르는 것에 반대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문학이 특정한 목적을 위한 선전 도구가 될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다음으로, 언어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언어는 인간의 감정 표현이나 의사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소리와 문자 등의 수단을 가리킨다. 문학에서 언어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므로 언어의 사용 정도에 따라 문학으로서의 가치와 질이 현저하게 달라진다. 하나의 단어 사용 여부에 따라 문학의 존재 이유가 좌우되기도 한다. 문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언어에 관한 한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에 가까이 있다는 자긍심을 벗어 버린 적이 없다. 이와 달리 하나님의 완전한 주도권을 내세우는 신학은 언어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 일종의 섭리주의적 입장을 표방한 신학의 경우,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 하여 관심을 소홀히 하고 상대적으로 성령이 주관하시는 초월적 수단에 더욱 집중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세 번째로, 인간 정신에 대한 것이다. 문학은 인간의 삶과 행복을 무엇보다도 중시한다. 삶의 중심은 현재에 있으며 미래적 소망은 다분히 부수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인간 중심의 사고가 문학을 지배할 수밖에 없다. 문학은 인간의 존재를 중하게 여기는 인문주의, 또는 인본주의의 토대 위에 서게 된다. 이는 자칫 신본주의에 반하는 비신앙적 사고라고 지적받을 수도 있다. 인간 정신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세상의 것들을 취하기 위해 신앙에서 분리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모든 학문이 각각의 영역에 갇혀 있던 시간이 지나고 서로 대립적 입장에서 벗어나게 되자 가장 가깝고 친근한 만남의 구도를 형성한 것이 문학과 신학이다. 상상은 거짓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리신 삶의 지혜로 인식하는 변화가 찾아왔다. 문학을 대하는 사람들은 글 속에서 자신의 삶과 일치하는 모습을 보게 되거나, 또는 대립하는 상황과 마주 설 수 있다. 거기서 생기는 기쁨이나 분노가 자신의 인생관을 형성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가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기회도 얻는다. 교리로서 정해진 결과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방식이 아니라 삶을 통해 폭넓은 이해와 경험의 과정을 거치며 하나님의 의와 만나는 자리에 이른다는 사실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언어는 사람이 만들어 쓰고 있는 소통의 도구다. 문자가 없었던 시대나, 문자가 있었어도 대다수가 그것을 알지 못했을 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구비문학 시대가 있었다. 그 시간은 무척 길었고 유능한 기록자가 나오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기록자는 특별한 지식을 갖고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으로서 기록문학 시대를 여는 선구적 역할을 했다. 성경 말씀이 기록되기까지 고대의 신앙인들에 의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역사가 계속 입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다가 모세, 다윗, 또 신실한 예언자들이 말씀을 기록하였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루어진 일이지만 성령께서는 지금까지 없었던 일을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이전에 믿음의 사람들이 경험하고 바랐던 바를 생각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들은 문학의 장르, 곧 형태상의 분류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말씀을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문학사적 흐름에 따라 하나님 말씀이 기록되고 신학의 체계가 성립되었으며 지금도 인간의 언어를 통해 진리가 선포되고 있다.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곳마다 그 땅의 언어와 문학은 새로운 창조적 결실을 이루어낸다.

끝으로, 문학이 지향하는 인문주의나 인간 정신에 관한 문제다. 인문주의는 신본주의와 대립한 비신앙적 사고라는 오해를 받았다는 점을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다. 그래서 기독교적 인문주의라는 방식으로 신학과 만남을 시도했으나 신학 속에 설 자리를 얻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제 학문에 대한 편향적 인식은 사라져야 한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선다. 문학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야다.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 인간 정신을 탐구하고자 애쓰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신학은 인간을 만드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을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둔다. 따라서 문학과 신학은 인간 정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전개되는 자리에서 서로 만나고 함께 걸어가야 한다.

김수중 (조선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동안교회 협동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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