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친구로 만나다

아시아, 친구로 만나다

[ 논설위원칼럼 ]

안홍철 목사
2018년 10월 08일(월) 13:53
아시아, 친구로 만나다



초등학교 때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체육시간에 운동장에서 노는데 친구가 나더러 어떤 할머니가 찾는다고 했다. 멀리서 보니 엄마가 다른 엄마들과 교실로 가고 있었다. 엄마는 42세에 나를 낳았기에 다른 엄마에 비해 쪼그라들어 친구 눈에는 할머니로 보였던 것이다. 그 사실이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엄마가 학교에 오는 날이면 지나가듯 하는 친구의 말들이 온통 놀림으로 들려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 나이를 조금씩 먹어 연초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려보니 하늘나라에 계신 늙고 쪼그라든 어머니가 새삼스레 보고 싶어진다. 부끄러워 피하고 싶었던 그 어머니의 가치를 이제야 마음으로 배워가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런 수치심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아시아'에 대해 품어온 생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아시아는 뭔가 부족함과 부정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근현대 역사를 보면 아시아는 서양 강대국의 윽박과 침략 앞에 속수무책 당하기만 했다. 나라는 빼앗기고 국민은 수탈당하고 힘없이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인도차이나'란 이름도 그렇다. 서구 열강이 침탈한 인도와 중국 사이 넓은 땅을 달리 부를 이름이 없어 인도차이나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시아는 이름도 없이 존재도 없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역사에서 멀어져갔다. 그런 아시아가 나에게는 부끄러워 피하고 싶은 얼굴이었고 유럽보다 더 너머에 있는 머나먼 땅으로 느껴졌다.

'아시아'의 어원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동쪽에 있는 땅'이다. 서구 유럽이 중심된 관점에서 보면 아시아는 동쪽에 있는 땅, 변두리 지역, 알려지지 않은 나라들, 소외된 땅이다. 신비로우나 가난한 나라들, 큰 땅에 종이호랑이 같은 백성들, 깨지고 상하여 피흘리면서도 침묵해야 했던 무기력한 민족들이었다. 그런 피투성이 아시아에 지금은 전 세계 인구의 6할이 넘는 45억의 인구가 46개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역사의 질곡, 전쟁과 식민지의 처절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아시아를 보면서,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겔 16:6)고 쓰러진 예루살렘을 일으켜 세우시던 하나님의 음성이 떠오른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또 다른 자녀들인 아시아를 찾아 일으켜 세우시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아시아가 세계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여 아시아의 잊혀지고 숨겨진 가치를 찾게 되었다. 합리적 이성만이 아니라 정과 감성의 문화도 있음을, 무한경쟁의 경제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 공존과 상생의 세상이 있음을, 조직구조를 넘어선 이웃사촌 마을 공동체가 있음을, 빼앗고 착취하는 자연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자연도 있음을 찾아야 할 것이다. 아시아의 가치, 숨은 아시아의 진솔한 가치를 우리는 허름한 옷차림을 한 아이들의 까만 눈동자 속에서, 도구 몇 안 되는 부엌에서 밥 짓는 아낙네들의 손길 속에서, 천수답 일모작 논일을 하는 핏줄 선 팔뚝에서, 드넓은 강과 푸르른 들판에서 찾아야 할 일이다.

여기 작은 공동체도 '아시아인과 함께 하는 한국교회'라는 표어 아래 봉사선교의 비전을 품고 아시아적 가치를 찾아가고 있다. 물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는"(요 3:16)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안에서 말이다. 인도의 사제 아자리아는 1910년 에딘버러 국제선교대회에서 이렇게 호소하였다. "여러분들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음식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여러분의 사랑을 구합니다. 우리에게 친구들을 주십시오." 아시아는 우리에게 친구로 다가오라고 속삭인다. 주는 사람, 돕는 사람이 아닌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롬 12:15) 이웃으로, 친구로 아시아를 만날 때다.



안홍철 목사/한아봉사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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