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신한청년단' 활동 … 대한애국부인회 조직

상해 '신한청년단' 활동 … 대한애국부인회 조직

[ 3.1운동100주년 기획 ] 기독교교육사상가열전 2. 김순애 <2> 남편 김규식과 함께 독립운동가로

임희국 교수
2018년 10월 09일(화) 13:47
김순애 등이 주축이 돼 조직한 대한애국부인회.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순애는 1919년 중국 남경에서 김규식(金奎植)과 결혼했다.

그녀는 상해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에서 활동하며 남편과 함께 독립운동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신한청년단은 1919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 강대국들의 강화회의(講和會議)에 김규식을 파견하기로 했고 또 김순애 선우혁 김철 서병호 백남규 등을 만주와 국내에 비밀리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며, 여운형을 만주와 연해주로 파견하기로 했고, 그리고 조소앙 등을 일본 동경으로 파견하기로 했다. 그해 2월 상해에서 선편(船便)으로 부산으로 들어온 김순애는 백신영을 만난 다음, 대구로 가서 일본에서 건너 온 김마리아를 만났고, 서울로 가서 함태영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한국 대표의 소식을 전했다. 이때 김순애는 함태영으로부터 국내의 3.1운동 거사 추진상황을 듣게 되었다.

2월 28일 김순애는 중국 여성으로 변장하고 평양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오빠 필순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그녀는 국내의 3.1운동과 동일한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는데, 일제 당국이 그녀를 체포했다. 하지만 중국 관원의 호의로 탈출에 성공하여 다시 상해로 갔다.

상해로 돌아온 김순애는 그해(1919년) 7월 여성의 독립운동 참여를 목적으로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했다. 이때의 동지(同志)는 이화숙, 이선실, 강천복, 박인선, 오의순 등이었다. 상해 대한애국부인회는 서울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평양의 대한애국부인회 등과 긴밀히 연락하며 민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김순애는 이들 여성 단체들과 은밀하게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했고 독립운동가 가족들을 보살폈으며, 한국의 지도와 태극기를 제작하여 보급했다.

또한 김순애는 상해 임시정부에 의해 다시 설립된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1920년 1월에 대한적십자사는 부설기관으로 간호원양성소를 설립하여 무장 독립운동을 대비하였다. 9월에 해외 한인 교육을 위한 민족교육기금 조성운동이 시작되자, 김순애는 이에 솔선수범했다. 그녀는 상해 한국인 자녀들이 다니는 인성학교의 재정을 지원했다. 그녀는 임시정부의 후원 속에서 자녀 교육의 일도 담당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내홍을 겪고 있었다. 외교를 통한 독립을 주장한 이승만계, 무장투쟁 독립을 주장한 박용만계, 실력양성을 통한 독립을 주장한 안창호계 등으로 대립하였다. 출신지역에 따라 기호파 서북파 등으로도 나뉘었다. 게다가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대표성 인정 여부도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

1920년 9월 북경에서 임시정부의 외교 독립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던 계파들이 상해 임시정부의 불신임을 결의했다. 이들은 독립운동 모든 계파들이 모이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했다. 1921년 2월 김창숙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15명이 임시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격문을 발표하며 새로운 정부구성과 독립운동 방향수립을 위한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자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임시정부 각료들이 반박했다. 그런데, 상해의 여운형, 안창호 등이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기했다. 이에, 1921년 8월 국민대표회의 준비회가 조직되었다.

임희국 교수 / 장로회신학대학교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