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논리와 경제윤리의 충돌과 조절

경제논리와 경제윤리의 충돌과 조절

[ 신학플러스 ] 신학과 경제학의 만남

최성민 교수
2018년 10월 05일(금) 10:37
경제학과 신학의 만남은, 구체적으로 경제논리와 경제윤리의 충돌과 조절로 이해된다. 경제논리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으로 대변된다. 경쟁과 효율로 대변되는 경제논리는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충돌하게 된다. 예수의 가르침과도 정면충돌한다.(눅15장 잃은양 드라크마비유) 경제윤리를 네 가지 주제로 간단히 요약하면서 경제학과 신학의 만남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경제윤리는 경제적 불평등과 공평분배를 기조로 삼는다. 헨리 조지(Henry George)는 경제 불평등의 근원을 토지 소유로 인식했다. 성경의 출애굽 이후 신명기(27:17) 여호수아에서 토지소유와 분배라는 세계최초의 토지공개념을 선언하고 있다. 왕상 21:3에서 아합과 나봇의 대화에서 토지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매매대상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로마시대 이후로 지속된 전쟁이후 포로를 노예로 그리고 장군들에게 대토지를 하사하므로 소유케 하는(Famile)제도가 정착되면서 실질적인 토지소유로 인한 빈부격차와 양극화가 발생하게 된다. 프랑스혁명 당시 인구의 3%가 국부(국토)의 97%를 소유한다.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roudhon)은 그의 저서 '소유는 도둑질이다'에서 토지소유에서 발생하는 불로소득을 도둑질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justice)를 정의(definition)하기를 분배의 정의라고 단언한다. 어느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가라는 질문은 분배가 공정한가, 복지가 시행되는가이다. 우리나라의 가장 긴급한 문제 중의 하나인 주택과 공급가격의 문제인데, 한 나라의 민주화의 척도는 서민에 대한 주택정책과 비례한다. 또한 사회의료보장제도를 통해서 돈이 없어서 수술 받지 못하고 죽는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한 회사가 분배에 있어서 정의로운 척도는 사장과 신입사원의 임금격차를 보면 알 수 있다.

오늘날 신자유시대 CEO들은 보통 운영자금의 2~3%를 연봉으로 받는 것이 정설이 되어있다. 성경은 삼상(30:21~25)에서 다윗은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분배의 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끝났을 때 4강에 진출한 대표선수들에게 축구협회가 포상금을 지급할 때 월드컵 경기에 출전한 선수들과 후보 선수들을 차등지급하려 했다. 그 때, 선수들은 협회에 지급원칙을 거절하고 모든 선수들에게 동일한 포상금 지급을 요청했다. 협회가 거절하자 선수들은 포상금을 모아 공평하게 나누기로 결의하자 협회는 지급원칙을 포기했다. 경기에 나간 것과 안 나간 것의 차이는 없다는 것이다. 똑같이 훈련하고 노력했기 때문에 포상의 지급도 동일해야 한다는 매우 상식적인 선례를 남긴 것이다.

셋째, 마태복음 20장에서 하늘나라의 경제원칙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나라의 비유는 가르침대로 살면 이 땅이 하늘나라가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하늘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공평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과 일꾼들의 대화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임금을 보여주고 있다. 9시 12시 3시 5시 네 차례에 걸친 일꾼의 모집이 있었고, 6시에 일이 끝났을 때 주인은 모두에게 동일한 일당을 지급한다. 9시에 일을 시작했던 일꾼의 항의는 매우 합리적이고 당연해 보인다. 9시의 일꾼 요즘 말로 하자면 스펙이 뛰어나고 건강하고 다른 말로 하자면 금수저, 12시 그 보다는 못하지만 은수저, 3시 동수저 정도, 5시는 흙수저이다. 스펙도 없고 집안의 배경도 없고 건강도 부실하고 채용 조건에서 볼 때 아무도 관심을 끌 수 없는 자격(낮은 학력, 고령) 이 사람 역시 집에 가면 집에는 부양해야할 가족(약값이 필요한 환자, 분유와 기저귀가 필요한 유아 아동) 즉, 사회와 교회가 돌아보아야 할 계층이다. 9시 노동자는 어디 가서도 쉽게 취업이 가능한 계층이다.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의 저술 목적을 이렇게 이야기 했다. 즉, 나라가 부강해져서 빈부격차 없이 모든 국민들이 국가의 보호와 지원을 받으면서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아쉬움이 없이 살 수 있는 나라였다.

신학과 경제학의 만남은 정확하게 경제윤리와의 만남이다.

기독교 윤리는 인간에게 하나님 앞에서 인간다움으로 죄인 됨과 부끄러움을(염치) 가르친다. 인간의 죄성은 탐욕과 결합되어 한계와 절제를 모른다. 맘몬은 단순한 황금과 탐욕의 신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죄인 됨을 망각하는 탐욕의 신이다. 바울은 골3:5에서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선언하고 있다. 또한 탐욕의 쌍둥이인 음란은(창38:21 신전창녀)우상숭배 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는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을 언급하는데(이 말은 우리나라에서는 단단히 오해되고 오용된 것이다) 이 뜻은 자유방임이 아닌 하나님 즉, 절대자의 손(섭리)에 맡기자는 경건한 학자의 가르침인 것이다. 당시 중상주의 그리고 신분사회와 부의 절대편중 시대에 모든 사람이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자는 것이 경제학의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효율과 평등의 조화는 모든 경제체제의 궁극적 목표가 될수 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경쟁과 효율이 지배하는 세계일수록 더욱 약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해지는 것이며, 우리는 항상 효율을 추구하면서도 인간의 평등, 사회적 연대라는 가치를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이며 신학과 경제학이 만나서 인간을 위한 학문으로써 봉사하는 것이다.

최성민 교수(총회 인준 서울장로회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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