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함께, 역사와 함께: 한국교회사적 접근

믿음과 함께, 역사와 함께: 한국교회사적 접근

[ 9,10월특집 ]

박만서 기자 mspark@pckworld.com
2018년 09월 10일(월) 19:01
믿음과 함께, 역사와 함께: 한국교회사적 접근



I. 서론: 믿음과 함께, 역사와 함께; 한국교회와 민족주의

인간은 첫 번째로 태어나면서 특정민족(인종 혹은 국민)의 정체성을 갖는다. 그리고 두 번째로 태어나면서 곧 중생하면서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갖는다. 따라서 기독교인의 경우, 두 번째 정체성이 더 궁극적이고 영원한 것이지만, 첫 번째 정체성이 시기적으로 우선한다. 쉽게 말해, 우리는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나서 한국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인의 경우, 기독교가 보편적인 종교이기 때문에, 두 번째 정체성은 첫 번째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곧 세계주의와 민족주의,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이중성 혹은 긴장과 갈등이 나타난다.

한국의 역사적 역설이 나타났다. 한국에도 선교와 제국주의라는 거시적 맥락이 적용되었지만, 한국을 침략하려고 했던 제국이 서구열강이 아니라 아시아 이웃국가요 오랫동안 문화를 전수받던 일본이었다. 그리고 선교사는 대다수가 서구선교사였기에, 선교사가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이미지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한국의 반(反)일본제국주의운동은 강렬했고 집요했다. 이런 역사적 정황 가운데, 개신교 특히 미국개신교는 한국에 개혁의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했다. 한국교회의 초기 역사는 믿음과 역사 참여가 분리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 혹은 "교회와 민족주의"라는 주제가 등장했다. 그 결과,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민주화, 근대화 등의 대의명분과 결부되었고, 부정에 저항하는 반(反, anti)운동적 성향을 지녔으며, 민족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II. 한국교회와 근대화: 개국 전후: 백성(百姓)에서 식민지인(植民地人)으로

한국기독교인은 풍전등화와 같던 한국을 지키기 위한 보국,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애국 등의 면모를 보이면서, 민족종교로 정착해나갔다. 특히 일제의 침략과정을 지켜보면서, 교육을 통해 민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교육입국을 강조했는데, 이런 움직임을 한국기독교인이 주도했다. 즉 지역교회는 교회별로 초등학교 수준의 학교를 운영하였고, 중등학교 수준 이상의 학교는 선교사가 운영하는 선교학교(소위 미션스쿨[mission school])이외에도 한국인이 운영하는 기독교민족사학이 있었다.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성향을 나타낸 경우도 있었다. 한국교회가 민족종교로 정착해나가면서, 초기에는 왕정이란 정치체제를 그대로 놔둔 채 사회개혁과 정치개혁을 추구했지만, 결국 정치적 변화 즉 왕정이 입헌군주정 혹은 민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입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런 입장은 당시로서는 대역죄에 해당되는 사건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인은 막연한 정치적 정체성을 지닌 '백성'에서 보다 구체적인 정치적 정체성을 지닌 '민'(혹은 국민)으로 변화해 나갔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초기 개신교 특히 미국개신교의 정신적 세례를 받았던 한국인들이 정치개혁을 부르짖다 집단 투옥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놀라운 것은 이런 극한상황 속에서 집단 개종 특히 상류층 인사의 집단 개종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정치사회적 측면이 강했다. 사실 한국교회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의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피난처의 이미지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어 1907년 절정에 이른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종교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연이은 '백만명구령운동'을 통해, 한국교회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영적 체험 즉 성경공부, 전도, 기도(통성기도, 새벽기도), 회개, 전도 및 교회성장을 위한 운동 전개 등의 체험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영성의 원형을 이루게 되었다. 또한 한국교회는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급성장하는 동시에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한일강제병합을 전후해서는 거의 유일하게 전국조직을 갖춘 기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위상은 일제의 관점에서는 한국침략에 있어서 장애요소로 비쳐졌고, 한국의 관점에서는 민족적 책임을 의미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는 한편으로 1911년 105인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1919년 3·1독립운동의 주도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한제국 말기의 한국교회는 영성과 애국이란 두 가지 특성을 지닌 교회가 되었다.



III. 한국교회와 반제국주의: 일제강점기: 식민지인에서 국민(國民)으로

일제의 종교정책은 크게 3가지로 나뉘는데, 즉 어용화, 회유와 통제, 무시 등이었다. 어용화의 대상은 불교와 유교였는데, 이 정책은 상당히 성공했다. 한 가지 반증이 3·1독립운동 당시, 주도세력이 천도교(동학)와 개신교였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 인사는 극소수였다. 회유와 통제의 대상은 기독교였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한국교회의 민족주의적 성향 특히 반제국주의적 성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선교사의 존재였다. 전반적으로 일제의 기독교 억압정책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한국교회는 묵시록적인 신앙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한편으로 일제의 멸망을 기다리면서 현재적 고난을 감내했고, 다른 한편으로 신사참배라는 신앙말살정책에 맞섰는데, 사실상 일제에 대한 저항이 거의 불가능했던 일제말기에 소수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은 종교저항을 넘어서 거의 유일한 정치저항의 사례가 되었다.

특히 내년 백주년을 맞는 3·1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민족저항운동이었는데, 최초에 운동을 주도했던 것은 천도교였지만, 나중에 운동을 확산해나갔던 것은 기독교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대부흥운동을 통하여 신앙적인 토착교회가 되었다면, 3·1독립운동을 통하여 정치사회적인 민족교회로 인정받게 되었다.

3·1독립운동의 여러 가지 유산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임시정부 수립이었는데, 임시정부는 민주정을 정치체제로 내세웠다. 임시정부가 민주정을 채택한 것은 곧 대한민국이 된 것은, 한편으로 이전의 정치개혁의 유산을 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해방 이후 새로운 한국의 정치체제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IV. 한국교회와 국가재건: 해방 이후: 국민에서 시민(市民)으로

해방은 분단과 더불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사회는 국가재건과 통일이라는 과제를 안게 되었고, 한국교회는 이런 국가적 과제 이외에도 교회재건이라는 과제까지 안았다. 이런 가운데,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는 정부수립, 한국전쟁, 전쟁복구, 산업화와 민주화 등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는 현실과 이상이라는 양면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은 독재, 이념갈등, 사회분열, 각자도생, 압축성장, 민주항쟁 등의 파란만장한 역사로 이어졌다.

비록 많은 대가를 치렀지만,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양대 과제를 갈등과 분열 속에서도 해결해내었다. 그 결과 한국은 세계적인 국가로 발돋음 했다. 한국교회는 이런 사회변동 속에서, 보수적인 교회는 사회발전과 교회성장의 상관성을 통해 산업화에 기여했고, 진보적인 교회는 민주개혁과 하나님의 선교 실천이라는 상관성을 통해 민주화에 기여했다. 그런데 외견상 대조적으로 보이는 이 두 가지 과제 모두에 신앙이 힘을 불어넣었다. 특히 20세기 후반 강압적인 군사독재 하에서, 교회는 거의 유일한 반체제집단 혹은 저항세력으로 사실상 민주화를 단독으로 담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V. 한국교회와 세계화: 20세기 말 이후: 단일민족(單一民族)에서 다민족(多民族)으로

한국교회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사회의 긍정적인 변화에 동조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또한 다문화, 다민족(다인종), 다종교사회라는 새로운 사회 환경에 적응하고 발전하는 모델을 만드는 과제도 안고 있다. 더구나 통일이 북한이탈주민(탈북자)과 핵위협 및 비핵화라는 예상치 못한 요소들로 인하여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이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는 과제까지 안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이상에서 언급한 한국사회의 문제를 공유하는 동시에 한국교회 나름의 문제까지 안고 있다. 교회 성장 둔화, 목회자 타락, 세습 등의 교회 내적인 문제뿐 아니라, 기성종교 쇠퇴, 교회 이탈 현상, 개인적 영성 등의 교회 외적인 문제까지 직면하고 있다. 특히 교회 외적인 문제는 새로운 종교현상의 대두라고까지 일컬을 수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종교집단의 정치화가 새로운 이슈로 등장하였다.



VI. 결론: 역사와 함께, 믿음과 함께; 민족주의와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초기의 '개혁의 아이콘'으로서의 이미지도 가지고 있고, 중기의 '교회성장과 선교성장'이라는 자랑거리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안티기독교운동, 가나안성도 현상, 개독교, 기독교 극단적 정치집단' 등으로 뭇매를 맞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새로운 역사 현실이 어떻게 새로운 믿음의 회복과 개혁을 가져올 것인가가 화두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한국교회의 현시점을 '역사에서 믿음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라고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한국교회가 엄청난 위기에 처한 오늘날,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일이 일회적인 행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자체의 미래를 여는 일로, 나아가 다시 한 번 한국사회의 희망이 되는 일로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안교성 목사(장로회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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