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거미줄과 당신3

조나단 에드워즈, 거미줄과 당신3

[ 특별기고 ]

Paul Louis Metzger
2018년 08월 20일(월) 11:47
조나단 에드워즈, 거미줄과 당신3

비(非) 공동 하나님 ! 공동 선



에드워즈는 그의 지적인 능력이 절정에 이르렸을 때에 비극적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의 원인은 장질부사 예방접종의 합병증의 결과였다. 에드워즈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그의 신학적 및 윤리적인 줄을 어떻게 짰었을까? 나에게 가장 관심을 끄는 분야는 아프리카인들과 원주민 인디언들과, 또한 노예들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에드워즈는 노예들을 소유하였고, 노예 소유자로서 극심하게 비판받았던 한 기독교 목사를 옹호할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아프리카 노예 매매를 반대하고 성토하면서 노예에 대한 그의 자세를 개진했던 것을 언급하는 것은 중요하다. 아프리카인의 노예 매매를 결국 반대하게 된 그의 이유는 '아프리카인들을 납치하고 또한 아프리카 나라들에서 그들을 빼앗아왔다'는 것 이었다.이에 대해 George Marsden은 "에드워즈가 노예 직을 그것 자체로 그릇된 것이 아닌 것을 옹호했던 동시에, 아프리카인 노예매매를 비난했다"면서 "'다른 나라들'이 아프리카의 모든 나라들에게서 공민권을 빼앗을 어떤 권한이나 혹은 임무를 가지는 가?"라고 질문했다. 에드워즈 사상에서 Minkema는 다음과 같이 썼다. "노예직과 노예매매에 대한 에드워즈의 사고에 있어서의 변화는 구속(redempion)의 사역을 축진 시킴에 있어서의 그의 정력을 다 쏟는 관심의 잔재적인 결과로서 왔던 것이다." 에드워즈는 '새로이 수입된 노예들'의 매매를 지원하는 것으로부터 수입을 반대하는 것으로 생각이 바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제도로서 노예 직에 대한 반대하지 않은 옹호자로서 남았고 또한 그 자신 노예들을 계속 소유했던 것이다.

또한 에드워즈가 노예제도가 임박한 천 년 기 동안에 끝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을 부각시키는 것은 의미가 있다. 더욱이, 적어도 Marsden이 추정했듯이, 에드워즈는 인디언들과 아프리카인들을 영적으로나 종족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Marsden의 관점으로부터, 에드워즈에게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토착 미국인이나 또는 아프리카의 문명들이 기독교왕국의 표준에 이르지 못했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에 대한 Marsden의 해석은 '토착 미국인들 및 아프리카인들은 그들의 서방의 동료들과 같은 동일한 '권리들'과 '잠재력들'을 가졌으며 또한 천 년 기 동안에 종교에 있어서나 배움에 있어서 비범한 진보들을 만들 것'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 여행 중에, 필자는 에드워즈의 논문 'The Nature of True Virtue'를 접했다. 사망 후에 출판된 그 책은 에드워즈가 '반-노예 논쟁'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드워즈의 계층적인 본능들은 그가 평생 동안 움직여가는 길에 서있었던 것이다.

에드워즈는 '진정한 덕목'을 "일반적으로 존재(Being)에 대한 심정이 그 동의와 성향과 또한 연합으로 또한 그것은 일반적인 선한 의지로 즉시 행하 여 진다"고 정의하였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또 다른 주요한 용어, '일반적인 존재'(Being)를 사용하였다. 때때로 에드워즈는 진정한 덕목을 '일반적인 선의'를 의미하는 '인자함'을 가진 '일반적 존재(Being)에 대한 인자함', 혹은 하나님과 및 동료 인간들에게 확대된 사랑으로 정의했다. 그러한 용어들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에드워즈의 추종자들은 인자함에 대한 그의 개념을 반 노예 직에 대한 명백한 함의들을 갖고서 "사심이 없는 인자함" 혹은 "사심이 없는 것"으로 한층 더 다듬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이 공격한 것은 종족적이거나 혹은 사적인 사랑인 것이며, 또한 하나님과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렇게도 많은 방식들로 종족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현대 사회에 대한 의의 있는 뜻을 갖춘 심원하고도 강력한 논문이다.

필자는 에드워즈가 노예직의 문제에 대해 명백하게 되고 모든 그것의 형태들로 그것을 배격했어야 함을 원하는 한편, 그는 우리 모두와 꼭 같이 과정(process)중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요점은 그를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와 꼭 같이, 에드워즈는 그의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의 삶을 숙고해 볼 때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식민지 시대에 있어서 제도로서의 노예제도를 배격했을 것이다. 에드워즈을 생각할 때, 우리로 하여금 좀 더 겸손하게하며 또한 진리를 짜기 위한 우리의 기질들을 좀 더 알도록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Paul Louis Metzger(교수 Ph.D)

문전섭역(전 대전장로회신학교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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