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거미줄과 당신 2

조나단 에드워즈, 거미줄과 당신 2

[ 특별기고 ]

Paul Louis Metzger 교수
2018년 08월 14일(화) 10:50
조나단 에드워즈, 거미줄과 당신 2



우리가 요나단 에드워즈의 거미들에 대한 매력에 대해 말했던 것에 비추어 어떤 이들은 그의 신학을 불균형적인 거미줄과 같은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것은 왜 그런가?

에드워즈는 '성난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죄인들)'이란 설교에서 성난 하나님을 활활 타는 불 꽃 위에 놓여있는 거미처럼 죄인을 지옥의 불길에 매달리게 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사람이 거미나, 혹은 어떤 혐오감을 주는 곤충을 불속에 가두어놓는 것과 같은 식이다.

이 설교에 기초해서, 에드워즈는 심판과 지옥에 대하여 병적이고 집착적이며 비관주의자다. 이같은 내용이 사실이라면, 에드워즈의 문학적인 거미줄은 희망과 낙관론과 또한 미, 심미적인 온전함에 대한 어떤 의식도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미와 균형에 대한 에드워즈의 사랑을 주목하는 것 이외에,'성난 하나님의 손에 있는 죄인들'은 에드워즈의 설교 목록의 전체를 나타내지 않는다.

설교가 담고 있는 것은 우주적인 낙관론을 매우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그것은 개인들 및 천체들을 궁극적인 심판 및 구속(Redemption)의 세계에로 묶고 있다. 죄 및 성난 하나님의 비관주의는 승리적이며, 사랑하는 구주를 통한 구원의 위안을 주는 소망에 의해 극복되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공포감을 주는 설교를 할 때마다, 그것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재난적인 좁은 길로부터 또한 그들의 사랑들의 바른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이키는 더 큰 운동의 일부였다.

더욱이, 그 편집인들은 그들의 독자들에게 'A Divine and Supernatural Light'를 참고하라고 하는데, 그 책은 장려한 언어들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제시하고 있다. 이 특별한 작품은 개인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필자는 OMSC의 요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여행을 되돌아보았을 때 에드워즈의 신학과 설교들에서 균형에 대한 명백한 추구를 생각할 수 있었으며, 또한 내가 좀 더 근래에 에드워즈의 심미적인 상상력을 숙고해왔다. 우리의 안내원이 그 여행 중에 '죽음의 편만함'에 대해, "얼마나 많은 청교도의 교훈적 삶이, 얼마나 불안한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고안되어졌다"에 주목해서 말했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잠(sleep)은 그 자체가 일종의 죽음이라고 말하며, "이 날은 지났습니다.그러나 내가 확실히 또 다른 날을 살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지를 저에게 말씀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가르쳤다.

의심 없이, 바로 그 젊은 시절로부터 나이 들 때까지의 삶에서 죽음에 대한 끊임없이 밀착된 접근, 또 죽음의 임박한 위협이 에드워즈 초기 설교를 형성했다. 필자는 에드워즈가 '위대한 각성'을 설교했던 그 자리를 표시한 포도원 정원의 설교 기념비에서 그를 느낄 수 있었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심미적인 온전함이 부족하다. 그러나 사람은 우리의 본성의 진보에 대한 더 작은 천사들을 보지 못한 천진스러운 낙관론으로 인해 미치지 못한 그를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도 실망의 어두움으로부터 우리를 인도할 빛을 결코 보지 못하는 병적인 비관주의의 공포에로 떨어지게 하는 에드워즈를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극복하기 위하여 어떤 경향성들을 가장 애써야 하는 가-순진한 낙관론인가 혹은 병적인 비관론인가? 만약 우리가 우리의 영혼들의 상태에 대해 주의하지 않거나 혹은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불이행으로 우리 자신을 만드는 것이 불균형적이며, 또한 뒤죽박죽의 거미줄에로 사로잡혀지거나 또는 함정에 빠지게 될 것이다.



Paul Louis Metzger 교수(Ph.D, OMSC 초빙교수)

번역 : 문전섭 목사(전 대전신학교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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