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김구, 다양성 강조한 민족지도자

기독교인 김구, 다양성 강조한 민족지도자

백범 김구 서거 69주기, 그의 신앙인의 면모도 기억해야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8년 06월 27일(수) 17:02
백범 김구 선생. 6월 29일은 김구 선생 서거 69주기가 되는 날이다.
6월 29일은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9주기가 되는 날이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지난 6월26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백범 김구 선생 제69주기 추모식'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오진영 서울지방보훈청장 등 각계 인사, 유가족, 독립 유공 단체장, 광복회원, 시민 등이 참석해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생의 뜻을 기렸다.

특히 올해는 이례적인 남북 화해 무드 속에서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염원하던 역사적 인물로서의 김구 선생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 평범한 사람)'의 '범(凡)'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백범(白凡)으로 지은 김구 선생은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을 거쳐 국무위원과 주석을 지냈다. 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으며 해방 후에는 통일된 자주 민족국가의 수립을 주창했다.

그는 1896년 2월 명성황후를 시해한 혐의의 왜병 중위를 맨손으로 처단했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이듬해 고종황제의 특사로 집행이 중지되어 승려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대 후반에서야 기독교인이 된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지난 2012년 발행한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37호에서 발표된 최기영 교수(서강대)의 논문에 따르면 김구는 1902년 전후 기독교를 수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기영 교수는 "그는 신앙으로서만이 아니라 국권회복의 방편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여, 황해도에서 교육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며 "그는 종교와 교육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을 생활화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김구 선생은 1911년 안악사건으로 투옥된 이후 심리적 전환을 가져와 기독교에 기반을 둔 도덕적인 생활태도와 신앙이 약화되었지만 모친과 부인은 기독교 신앙을 충실히 지켰다. 또한, 상해임시정부 시절에는 기독교계와 밀접하게 지내지 않고 한인교회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1945년 11월 해방된 고국에 돌아온 이후에는 중국에서와는 달리 기독교인으로 교회에 출석하며 친기독교적인 행보를 보였다. 개인적인 행사도 기독교식으로 치렀고, 기독교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최 교수는 "그는 기독교만을 중시하거나 우선하는 편향성을 지니지 않았다. 민족적 관점을 중시하였으며, 종교 간의 조화로운 발전을 기원하였다"며, "그가 보인 종교적 관용성과 다양성은 오히려 그가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민족지도자였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고 김구 선생의 신앙을 평가했다.


표현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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