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가정은 안녕하십니까? (3)교회목회 VS 가정목회

목사님 가정은 안녕하십니까? (3)교회목회 VS 가정목회

[ 특집 ]

이석우 목사
2016년 05월 18일(수) 08:37

이석우 목사
성도교회

지난 어버이주일 설교에서 필자는 '신앙생활은 가정생활'이라고 말했다. 우리 신앙이 꽃 피워야 될 곳은 교회에 앞서 가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교회에서 충성스럽게 일하고 모범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그것이 가정에서 증명되지 않는다면 그 신앙엔 문제가 있다. 가정에서 시작된 믿음의 고백과 표현들이 쌓여서, 그것이 믿음의 능력으로 나타나야 할 곳이 교회다.

목사나 믿음이 좋은 선배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은 잠깐이지만, 부모에게 받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이런 면에서 자녀들 눈에 비치는 부모의 모습은 너무나 중요하다. 자녀들은 자기 부모들의 대화와 행동 속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존중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정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부모의 해결 방식이 세상적인 방식인지 아니면 신앙적인 방식인지를 잘 안다. 자신의 부모가 신앙과 물질, 기독교 가치관과 세속적인 가치관 사이에서 얼마나 갈등하고 있는지도 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가 손해를 보거나, 당장에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하나님을 선택하는구나!'라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백 마디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전한 다음, 나 자신을 돌아보았다. 이제 23년 차 목사가 됐지만 여전히 교회 목회가 쉽지 않다. 아무리 설교하고 교육해도 변한 것 같지 않은 교인들, 목사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것 같은 당회원이나 제직들, 내가 뭐라 하기 전엔 열심히 부서를 챙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부교역자들의 모습만 보인다. 어느 순간 나 자신이 '섭섭병'에 걸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나는 어떤가? 그렇게 삯꾼 목자를 비난했는데, 나는 내가 받은 삯에 부끄럽지 않은 목회를 했는지? 내 목회에는 정말 진정성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한 가지 터득하고 있는 것은 목회의 조바심을 버리고, 좀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당회원들과도 의견 차이가 날 때면 감정을 숨기기가 쉽지 않아 때로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조금씩 기다리고, 이번에 못하면 다음에 하자고 하는 여유가 생기고 있다. 교인 한 사람의 변화도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의 작업이라는 것이 깨달아진다. 하긴 목사인 나도 쉽게 변하지 않는데, 그 누구를 지적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느 선배 목사님이 "목회에 충성은 있어도 성공은 없다"고 하셨나 보다. 힘이 들어도 설교, 목회 상담, 교육에 끝까지 충성하는 것이 목사의 길이요 보람이리라.

그리고 가정의 달을 맞아 나의 가정을 돌아본다. 교우들에게 "신앙이 꽃 피워야 될 곳은 교회에 앞서 가정이어야 한다"고 전했는데, 가장으로서 내 아내와 아들들에게 진심어린 지지와 존경을 받고 있을까? 솔직히 필자의 가정 목회는 더 미숙하다. 5년 전, 목양칼럼을 통해 담임목사 자리는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목회자가 감당할 수 있지만 가정에서의 나의 역할, 곧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은 없기에 가정 목회가 중요함을 이야기했었다.

이미 오래 전 별세한 선친이 목사이셨기에, 목사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특권이나 감사할 것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생활의 대부분이 노출되거나 주변의 높은 기대치에 이르지 못해 가슴앓이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은연 중에 목사 아버지를 둔 자녀들에게 요구되는 그 무엇 때문에 숨 막히는 답답함과 반항심이 생겼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나 자신이 목사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아이들 입장보다 나의 입장이 우선시 됐다.

부목사로 부임하던 날, 1부 예배시간 교우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이제 겨우 세 돌이 지난 아들이 강단 앞에서 뛰었다고 처음으로 회초리를 들었다. 4년간의 캐나다 유학시절, 아이들이 일 년에 두어 차례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하거나, 머리에 염색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엄하게만 대했다. 어느 작은 변화나 일탈도 아이들의 성장의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목사의 자녀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하며, 항상 반듯한 모습만 강조했다. 정말 아이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의 시선과 판단을 의식했던 것이다.

뒤늦게 가정 사역을 접하며 그동안 나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숨막혔을까 생각하니,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두 아들에게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아빠가 너희에게 잘못했다. 너무나 미숙한 아빠였다. 그동안 아빠 의지대로 너희를 키운 것을 용서하고, 마음에 쓴 뿌리가 없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찰스 셀의 '가정사역(Family Ministry)'에 나오는 도로시 로 놀테(Dorothy Law Nolte)의 시를 소개한다.

만일 자녀가 갈등 속에 자라면, 싸움을 배운다 / 만일 자녀가 두려움을 가지고 자라면, 염려를 배운다 / 만일 자녀가 동정을 가지고 자라면, 스스로를 애처롭게 여긴다 / 만일 자녀가 조롱을 받으며 자라면, 수치심을 배운다 / 만일 자녀가 창피를 당하며 자라면, 죄책감을 배운다 / 만일 자녀가 격려를 받으면 자라면, 자신감을 배운다 / 만일 자녀가 관용 속에 자라면, 참을성을 배운다 / 만일 자녀가 칭찬 속에 자라면, 칭찬 받는 것을 배운다 / 만일 자녀가 인정을 받으며 자라면, 사랑을 배운다.

교회 목회가 기다림이라면, 가정 목회도 기다림이 아닐까? 때가 되면 충분히 자기 몫을 감당할 수 있을 텐데, 조급한 아빠의 간섭이 자녀들을 힘들게 하고,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지나 않았는지 돌아본다. 그리고 이제는 찢어진 청바지를 입거나 머리를 형형색색의 염색을 한다고 해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한다. 겉으로는 멀쩡한데 마음으로는 거절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아들보다 겉은 어떨지라도 부모에게만큼은 사랑과 인정받는 아들을 원하기 때문이다.

목사 아빠지만 자녀 교육에 너무 미숙했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면 나는 가정 목회의 실패자가 되고 말 것이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라는 시 구절처럼, 우리의 실수와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녀를 건강하게 키우시고, 목회자의 가정을 행복하게 세우시는 주님이 계심을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나만이 감당해야 할 가정목회의 영역이 있음을 깨닫는다. 가정 목회의 상대인 아내와 자녀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그들 곁에 있어야겠다. 교회 목회가 기다림으로 꽃을 피우듯이 가정 목회도 기다림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여, 나의 격려와 관용과 칭찬과 인정 속에 내 자녀들이 자신감과 함께 인내와 사랑을 배우며 성숙한 신앙인이 되기를 바란다. 정말 부족한 아빠인 나를 통해 아이들이 신앙은 교회생활이 아니라 가정생활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았으면 좋겠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