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사람들, 가난에 허덕여도 주체사상 못 버려"

"북한 사람들, 가난에 허덕여도 주체사상 못 버려"

[ 인터뷰 ] <본보 단독인터뷰> 근로자 신분으로 개성공단에서 근무한 김주윤 목사

표현모 기자 hmpyo@pckworld.com
2016년 03월 08일(화) 09:59
   
 

"개성공단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 정말 불쌍합니다. 장군님이 앞에서 이끌어주시니 언젠가는 잘 먹고 잘 사는 지상낙원이 오리라 믿고 있는데 딱할 뿐이지요. 주체사상이 너무 신앙화 되어 있어서 오히려 내가 주님을 저들이 지도자를 믿는만큼 믿나 하는 반성을 할 정도입니다."
 
개성공단에서 11년간 근로자의 신분으로,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목회자로서 상주하다가 최근 개성공단 폐쇄로 남한으로 돌아오게 된 김주윤 목사(62세)는 다시 개성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깊은 아쉬움과 함께 11년간의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그는 목사의 신분으로서가 아닌 그린닥터스에서 설립한 개성병원의 행정부원장으로 개성에서 근무하며, 원무와 접수, 앰뷸런스 기사 등의 일을 했다. 동시에 현지 남측 근로자들의 예배를 인도하고, 상담을 하기도 했으며, 북한의 의료진들과 근로자들을 위한 약품지원 등의 사역을 했다.
 
김 목사는 "개성공단에서는 초기에 병원 로비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모 회사의 신우회 예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함께 예배를 드렸다"며 "매일 감시당하고 무료한 일상에서 예배는 근로자들에게뿐 아니라 나에게도 너무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다.
 
11년간 개성공단에서 직접적으로 체험한 북한 사람들은 극심한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주체사상에 세뇌 당해 자신들의 지도자가 잘 살게 만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진 이들이었다.
 
"한번은 병원에 북한군 중령이 왔어요. 신발을 벗는데 양말이 아닌 발싸개를 하고 있더라구요. 선군 정책을 펼치면서 군인들에게는 특수한 대접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장교도 양말이 아닌 발싸개를 할 정도예요. 일반 군인들은 겨울에도 맨발이 많아요. 북한 의료진들은 의료도구도 변변치 않습니다. 일부 북한 의사들은 청진기도 없이 깔대기를 대고 진료하고 있어요. 한번은 젊은 여성이 손가락이 거의 절단되어 왔는데 의료용 도구가 아닌 니빠(니퍼)를 사용하더라구요. 일회용 주사기를 주면 한번쓰고 세숫대야에 담갔다가 재사용합니다. 일회용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더라구요."
 
김 목사는 목사의 신분을 감추고 갔지만 현지에서 예배를 인도한다는 이유로 감시원들에 의해 고발도 여러차례 당했다. 수요예배를 드린다는 이유로 마트에서 근무하는 북한 근로자의 신고해 총국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하고, 남측 근로자가 부의하게 '목사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바람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출입금지가 되어 두 달 동안 출입이 정지된 적도 있었다. 특히 북한에서 미국 목회자들을 억류했을 때는 개성을 들락날락하면서 군인들이 나를 딴 곳으로 끌고가는 것 아닌가하는 공포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어려움들이 많았다. 병원의 내부 규칙에 대한 변경에 대한 내용을 대자보로 써붙이면서 '개정일'은 며칠부터라는 식의 내용이 포함되었었는데 장군님의 이름 앞에 '개'자를 넣었다는 이유로 흥분한 북한 근로자들에 둘러쌓여 폭행을 당할 뻔한 일까지 있었다고.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근무하는 동안 잊지 못할 보람된 일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한번은 수요일에 같이 일하던 북측 근로자가 '선생, 오늘 수요일 아닙니까? 우리 공장 잘되도록 기도하고 오십시오'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한 감시원은 '선생님, 자꾸 예수 얘기 하시는데 예수가 실제 인물입니까?'하고 묻길래 설명해주었지요. 그리고 또 한번은 목숨을 걸고 북한 주민과 함께 기도한 일도 있었어요. 그런 기억들은 잊혀지지 않죠."
 
그는 개성공단에서 근무하는 남측 근무자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드러냈다. 김 목사는 "외로움, 답답함, 무료함을 개성공단에서의 삼중고라고 하는데 인터넷, 스마트폰을 할 수 없고, 전화도 자유롭게 할 수 없어 2주가 한계라는 말을 하곤 한다"며 "아버지를 목졸라 죽이는 꿈을 꾸는 청년, 스트레스로 발작을 일으키는 여성 등 힘들어서 버티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함해노회 전도목사의 신분으로 재정적인 후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고 한다. 아들은 등록금이 없어 휴학하고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폐병에 걸리고, 아내는 친정에 얹혀살며 눈칫밥을 봐야만 했다고.
 
"마음이 너무 힘들어서 데굴데굴 구르며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말씀을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또 따져서 물었더니 '얘 너는 그래도 남한에 살지 않니'하는 음성을 주셔요. 더 이상 불평 못했습니다. 하하."
 
현재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얻은 북한 선교의 중요성을 보다 많은 사람과 나누기를 원하는 김 목사는 "개성에서의 교회의 활동이 미미했지만 사실 북한의 문이 열리면 훈련받은 우리 교우들이 들어가서 전도할 수 있는 트로이의 목마라고 생각하며 자부심을 가졌다"며 "앞으로 교회들을 방문해 북한 주민들을 위해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경험을 나눌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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