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 '아르메니아'

[ 선교 ] 배현주 교수의 WCC 리포트/2015 상반기 실행위원회를 다녀와서(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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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18일(화) 14:23
   
▲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 추모기념관에서 헌화 후 예배를 드리는 모습.

2015년 상반기 WCC 실행위원회를 초청한 아르메니아 사도교회는 정교회의 두 분파 중 하나인 오리엔탈 정교회에 속한다. 1세기에 사도 다대오와 바돌로매가 아르메니아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는데, 이 사도적 기원으로 인하여 아르메니아 교회는 자신을 '사도교회'로 명시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301년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 국가인데, 이교도 국가였던 아르메니아의 개종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3세기 말엽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즉위한 트라다트는 신하 그레고리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적의 아들이자 기독교인임을 알고 나서는 굶어 죽게 할 요량으로 현재 코르 비랍 수도원이 위치한 아라랏 산 인근 지하 동굴에 그를 가두었다. 15년의 세월이 흐른 후 트라다트 왕은 자신을 짐승으로 착각하는 정신착란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장기간의 비참한 감금생활 동안 그레고리는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왕은 그레고리의 기도로 치유를 받고 기독교를 아르메니아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세상을 떠날 때 까지 두 사람은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 각자 자신의 방식대로 아르메니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에치미아진 총교구청 경내에 있는 성당은 4세기에 '계몽자 성 그레고리'와 트라다트 왕이 건축한 최초의 교회를 계속 복원하며 유지해온 성소로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아르메니아 교회와 국가의 핵심 상징이다.
 
아르메니아는 수백 년 간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20세기에는 집단학살과 러시아의 식민 통치를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기독교 국가다운 신앙적 저력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거의 전체 인구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경이로운 나라이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십자가의 네 끝마디를 갈라진 꽃잎처럼 벌어지게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꽃 이미지를 도입하여 십자가를 부활의 생명을 상징하는 꽃으로 재현하고 있다.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면서 전쟁과 박해와 고난의 역사를 감내해온 아르메니아인들의 저력 배후에 놓여 있는 창조적 신앙은 부활 소망을 가리키는 꽃 십자가 속에서 아름다운 형상으로 나타난다. 
 
에치미아진의 총교구청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아르메니아 교회들의 본부이고, 총대주교는 교회의 수장으로서 그레고리의 후예로 간주된다. 아르메니아 교회는 1962년 WCC 회원교회가 되었고, 총대주교 카레킨 2세는 부산 총회에서 오리엔탈 정교회를 대표하는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아르메니아는 1915년 인구 200만 명 가운데 150만 명이 오토만 제국에 의해 학살을 당하는 참혹한 비극을 경험하였는데 올해 그 백주년을 맞이하여 국제사회의 공식인정을 촉구하고 있다. WCC는 1983년 제6차 밴쿠버 총회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겪은 비극을 '집단학살(제노사이드)'로 인정함으로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공식인정한 최초의 국제기구들 중 하나가 되었고, 이번 실행위원회에서는 집단학살 백주년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노아의 방주가 머문 아라랏산(창 8:4)은 멀리 에치미아진에서도 볼 수 있었다. 높이 5100m를 훌쩍 넘는 그 장엄한 위용과 만년설의 신비한 자태는 장관이었다. 그러나 정작 아라랏 산 바로 아래 자리 잡은 코르 비랍 수도원을 방문해서 터어키의 철책이 아라랏 산과 수도원 사이를 매정하게 끊어 놓고 끝없이 펼쳐져 있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아르메니아의 아픈 역사와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아르메니아 성직자들과 시민들이 '주몽'과 '이순신' 같은 한국의 역사 드라마와 영화의 열렬한 팬이 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아르메니아 교회의 '정의와 평화의 순례'에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기원한다.

배현주(부산장신대학교, WCC 중앙ㆍ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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