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갱신과 예언자의 사명 감당하는 대표 언론"

"한국 교회 갱신과 예언자의 사명 감당하는 대표 언론"

[ 3000호 특집 ] 지령 3000호가 갖는 교회사적 의미

서정민 교수
2015년 06월 16일(화) 17:28

'한국기독공보'가 창간 제69주년, 지령 제3000호를 맞았다. 큰 축하와 갈채를 드린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그동안 수많은 독자들, 지원을 아끼지 않은 한국교회, 무엇보다 묵묵히 기독언론인의 사명을 감당해 온 신문사의 임직원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그 노고에 고마움을 전한다.
 
신문 역사, '고희'(70년), 주간신문 지령 3,000천호는 그렇게 흔치도, 간단히 달성될 역사도 아니다. 그동안 역사의 파란곡절(波瀾曲折)도 있었고, 진로의 혼미도 없지는 않았을 터이나, 무엇보다 괄목할 역사를 이루어 온 '한국기독공보', 그 흔적과 자취는 역사적 의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한국기독교 신문의 역사적 출발은 감리교계 신문인 '죠션크리스도인회보'이다. 1897년 2월 2일 창간된 주간신문으로 아펜젤러(H. G. Appenzeller)가 발행한 순 한글 신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두 달 뒤인 1997년 4월에 장로교 최초 복음선교사인 언더우드(H. G. Underwood) 발행으로 장로교계의 '그리스도신문'이 창간되었다. 이들 신문은 근소한 시차를 두고 간행되었지만 곧 한국기독교 언론의 효시이자, '한국기독공보'의 원류가 아닐 수 없다.
 
이 무렵 한국기독교계, 특히 선교사들 간에는 작금의 에큐메니컬 분위기와 내용상의 차이는 있지만, 강력한 교파 간 협력, 이른바 '선교 에큐메니즘'(Mission Ecumenism)의 역동이 존재했다. 심지어 1905년에는 한국선교를 수행한 미국의 복음주의 선교 교파 모두가 합동하여 한국에서 단일토착교회를 설립할 것을 결의하고, 추진할 정도였다. 물론 이 단일교회 설립 안이 그대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 전후 여러 부문에서 '선교 에큐메니즘'은 구체적 결실을 보이기도 했다. 즉 여러 교파 형 교회의 선교지역이었던 한국에서 첫째, 성서사업, 문서선교가 연합으로 실현되었고, 둘째, 각 학교와 병원 등 선교기관의 통합, 협력운영이 추진되었으며, 셋째, 장감(長監)을 하나로 통합하지는 못했지만, 장로교의 네 개 선교교파, 감리교의 두 개 교파 등 서로 다른 선교교파가 신학교를 공동운영하며, 결국에는 단일 장로교회 설립, 그리고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감리교회도 통합하는 결실을 이루었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각 선교교파는 서로 관할 선교지역을 할양하는 '교계예양'(敎界禮讓)을 실현하여 상호협력을 구현해 나가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교계 신문의 역사와도 무관치 않았다. 별도로 발행되기 시작한 '죠선크리스도인회보'와 '그리스도신문'은 '선교에큐메니즘'의 흐름이 최고조에 이르던 1905년 12월 '기독신보'(基督申報)로 통합되어 교파연합신문이 되었다. 이 '기독신보'야 말로, 한국기독교신문사의 최대, 최고의 역사적 전거(典據)가 되며, 사료적 가치로도 제일의 위치에 우뚝 설 수밖에 없다. '기독신보'는 1910년 이른바 '한일강제병합'의 시기를 그대로 관통하여, 일제 말기 민족수난이 절정기로 접어들던 1937년까지 간행되어, 해방 이전 한국기독교신문으로서는 가장 긴 발행역사를 지녔다. 그동안 1919년 3.1운동 전후에는 항일(抗日) 논조로 검열과 내 차례의 압수를 당했으며, 당시 이 신문사의 편집장으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이었던 박동완(朴東完)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한 때는 김관식(金觀植), 전필순(全弼淳) 간의 경영주도권 갈등도 겪었다. 결과적으로는 1937년 일제에 의한 폐간으로 그 수명을 다하였다.
 
'죠선크리스도인회보', '그리스도신문', '기독신보'로 이어지는 해방 이전 한국기독신문 역사에서 교계신문이란, 그야말로 종교 신문의 역할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한국 언론사, 한국 신문사의 중요한 중추로서 정치, 사회, 문화의 중요한 논지와 논거를 모두 형성하는 바탕이요, 한 축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주지하는 바이다.
 
그리고 마침내 8.15를 맞았다. 1946년 1월 17일 '한국기독공보'는 '기독교공보'라는 초교파지로 창간되었다. 한국현대사 언론의 '아노미' 상황 속에서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저널리즘'의 구현이 그 목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48년 '기독공보'로 개제되었고, 장로교 총회 교육부 인수 간행, 6.25 한국전쟁 중 중단, 1951년 12월 25일자 부산에서의 재 간행을 거쳐, 1954년 9월 장로교 총회의 공식 기관지로 간행 등을 거치는 역사적 자취를 지녔다. 그리고 한 때 1966년 9월 제848호로 폐간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으나, 1970년 7월 1일 '한국기독공보'로 복간되어 현재에 이르는, 한국기독교계 대표적 신문의 위치에 있다.
 
한국기독교는 역사 131주년을 맞았다. 그것은 그대로 한국장로교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지난 2012년 9월에는 한국장로교총회 100년을 지냈다. 올해로 103주년이 되는 셈이다. 필자는 지난 2012년 한국장로교총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독교사상' 연재의 첫 호 모두(冒頭)에 다음과 같은 언급으로 연재를 시작한 바 있다.
 
"한국교회는 장로교회가 성한 교회이다. 장로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교회이며, 대표적 지분을 지니고 있는 교회이다. 이러한 특징은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이다. 물론 유럽의 교회들 중에 개혁교회의 전통을 강하게 지닌 나라들이 많은데, 그들 개혁교회를 모두 장로교회의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특히 근세기 선교, 수용된 후발 기독교회와 그러한 지역과 나라들을 강조한 의미이다. 아무튼 한국에서는 기독교하면, '장로교회'가 제일 유명하고, 그 중에서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기독교의 '상표적' 의미로서도 가장 높은 '브랜드 가치'를 지닌다는 평가도 나와 있다."(서정민, "한국과 장로교의 처음 만남," '기독교사상', 제637호, 2012년 1월호 중).
 
한국기독교에서 장로교의 대표적 위치를 강조하는 것은 다수가 공감하는 일일 것이다. 별도의 사항일지 모르지만,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대부분의 교파, 즉 감독제 교회의 전통, 제도, 뿐만 아니라 신학적으로 알미니안(Arminian) 전통에서 마저 교회구성을 장로회식으로 가져가는 특징을 보인다. 단적인 예로 감리교회든 성결교회든, 오순절교회든 교회조직에 '장로'를 둔다. 이는 그만큼 한국교회는 수적측면 뿐만 아니라 기독교회의 보편적 '오리엔테이션 이미지'로 장로교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그 중에 '예장 통합'은 어떤 영향력의 자리에 있을까. 한국장로교회의 가장 큰 외형적 비판점은 극심한 분열이다. 교단의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사분오열을 보였다. 그러나 그 또한 군소분열의 '스펙트럼'이지, 한국 장로교의 원류를 역사적으로 손꼽는다면, 고신분열, 기장분열, 통합합동 분열 정도이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예장 통합'은 한국장로교의 추축이며, 따라서 한국기독교의 대표이다. 이를 한국교회의 '긍정적 테제'에서만 본다면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면서 그 역할과 영향력을 주도할 수 있는 위치인 것이다.
 
특히 '예장 통합'은 신학적으로도 객관적 중도지점으로 한국기독교의 신학적 바탕기조인 보수신학은 물론 에큐메니즘의 연대를 통한 진보적 신학까지 다 아우를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에 그 대표성은 극대화된다. 따라서 '예장 통합'의 총회 기관지이자 '메인 언론'인 '한국기독공보'의 위치와 역할도 '예장통합'과 동류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현재의 한국기독교, 그 역사적 과제에 대한 안팎의 시선은 결코 '긍정적 테제'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지점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세계교회는 위기이다. 한국교회는 더 큰 위기이다. 한국교회는 스스로를 위해서도, 세계교회에 대한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도 개혁의 노정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그대로 '교회'본래의 사명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은 '본령'(本領)을 회복하는 일이며, 그 처음을 재인식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교회와 사회의 관계로 개혁, 갱신의 본질을 상정해 보자. 교회의 역사를 통해보면, 교회는 늘 사회적 문제에 대해 비판적, 예언적 역할을 견지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는 교회의 '예언성'인 동시에, 교회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자기점검의 외연(外延)은 그렇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전제이기도 하지만, 교회 스스로는 지속적으로 자체적 갱신, 엄격한 자기비판을 해나가야 할 책무가 있다. 즉 교회는 외부로부터의 비판으로 개혁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 갱신으로만이 변화될 수 있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한국교회는 개혁, 갱신되어 나가야 한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자타가 공인하듯이, 그 안팎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교단이 '예장 통합'이다. 이는 '예장 통합'이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에 대한 비판적 예언기능을 강화하고 회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내재적 선행으로 한국교회 스스로에 대한 자성적 성찰을 솔선해 해나가야 한다는 책무를 또한 의미한다.
 
그런데 교회의 자체적 성찰기능, 대외적 예언기능은 본래 강단(講壇)의 선포를 통해 진행되는 것이 전통적 방식이다. 그러나 교회도 사회도 시대의 흐름에 병진해나가야 할 측면도 있다. 오늘날의 시대란 교회의 갱신도, 예언도 강단의 기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결국 언론, 교회로서도 교회 내 '저널리즘'의 역할은 그 중추에 자리하고 있다. '예장 통합'의 가장 공적인 언론은 '한국기독공보'이다.
 
이에 '한국기독공보'는 '예장 통합'의 한국교회 대표성, 상징성을 다 짊어지고, 또한 그 자체의 역사적 전통을 기반으로, 한국교회의 예언, 자체적 갱신 책무의 제일선에 서서 사명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를 더욱 강조하자면, '한국기독공보'의 양 어깨에 '갱신'과 '예언'이라는 한국교회 안과 밖의 무거운 책임이 모두 얹혀있다.
 
'한국기독공보'는 제69주년, 지령 제3,000호의 기념 팡파르를 울리는 동시에 한국교회와 사회의 위기를 심각하게 직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역사와 전통의 무게는 또한 그만큼 시대적 과제에 연동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지령 3,001호부터, 그리고 제70주년 이후의 과제로서 갱신과 예언의 좌표를 다시 점검해야 할 때이다. 다시 한 번 '한국기독공보' 제69주년, 지령 제3,000호를 축하하다. 
 
서정민/일본 메이지가쿠인 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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