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의 3년 6개월은 은혜의 시간"

"러시아에서의 3년 6개월은 은혜의 시간"

[ 선교 ] 러시아 선교 회상(下)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5년 03월 31일(화) 16:39
   

러시아 선교 회상(下)

유양업(전 선교사ㆍ시인)

우리는 정교회를 더 알기 위해 예배에 참석했다. 그들은 의자도 사용하지 않고 2시간 이상 선 채로 노인들은 지팡이를 짚고 서서 예배의식에 임했다. 그분들의 끈기는 대단했다. 강단의 성직자들은 단 위에서 화려한 예복을 입고 줄을 지어 주문을 외우면서 향단지에서 피어난 연기를 흔들며, 강당을 돌고있는 것이 이채로웠고 높은 곳에서 하늘에서 울려온 소리처럼 흘러나온 찬양대의 반주 없는 아카펠라 4부 혼성화음은 신묘하고도 가슴 찡한 감동이었다. 교회의 벽들에는 아이콘(icon)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예배 후에도 신도들은 아이콘들을 향하여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성상숭배의 표현인 것 같았다.
 
크레믈린 붉은 광장에 있는 바실리성당은 모스크바의 황제였던 이반 4세가 러시아에서 카잔 이족을 몰아낸 것을 기념하여 봉헌한 성당이다. 1555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560년에 환공된 건물인데 엄청난 공력을 들여 만든 유례가 드물 정도로 참으로 아름다운 건물이었는데 그와 같은 건물을 다시 건축하지 못하도록 건축가의 눈을 빼어 버렸다고 전해왔다. '전쟁과 평화', '부활' 등으로 유명한 톨스토이 생가도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는데 이곳에서 위대한 작품들을 생산해 내었구나 싶어 감회가 새로웠다.
 
마침 우리가 살고 있었던 바우만스카야와 인접한 푸시킨스카야 지역 에는 푸시킨 이름을 따서 학교나 상점 등이 있고, 또 그 지역 조그만 공원에는 푸시킨의 동상도 의젓하게 서있었다. 시비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 새겨져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정다운 친구를 만난 듯 노어로 새겨진 시 전문을 읽고, 반가운 감격을 마음에 담아, 나도 한국말로 이 시를 읊어 보았다.
 
모스크바에는 차이코프스키 음악학교와 그네씬 음악학교가 있는데 나는 그네씬 음악학교의 교수였던 발렌친레브꼬의 집에 다니면서 성악 사사를 받았던 것도 유익한 기회였다. 발렌친레브꼬 교수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유명한 볼쇼이 극장의 프리마돈나(오페라의 주역을 맡은 여성 가수)였고, 미국 등 외국에 다니면서 성악 활동으로 극찬을 받기도 했다. 레슨비를 드렸을 때 직접 받지 않고 피아노 위에 놓으라는 표정이었다. 예술인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었다.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학교강당을 빌려 교회를 하기로 했다. 계약을 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받은 '교회설립 허가증'을 손에 들고 가다가 눈길이 미끄러워 벌떡 넘어졌다. 허가증은 곤두박질 저 건너편에 떨어졌고, 주위사람들이 부끄러워 후다닥 일어났는데 왼쪽 손목이 아파 만져보니 뼈가 아사삭 소리가 느껴졌다.
 
'뼈가 부러졌구나'하고 만지작거리다 허가증을 겨드랑이에 끼고 손을 붙들고 계약 장소로 갔다. 계약을 하려고 기다렸던 선생이 깜짝 놀라며 정형외과로 급히 데려다 주어서 깁스를 바로 했다. 병원비를 전혀 받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공산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약이 없는지 아무 약도 주지 않아서 깁스한 손을 붙들고 많이 아파 괴로워했던 덕분, 남편의 손에서 처음으로 어설픈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것도 내가 입과 한 손으로 도와서….
 
주일날 교인들 점심식사를 위해 토요일마다 남편과 함께 마켓에 가서 식품들을 준비하여 주일 예배 후에는 빵과 과일 음식들을 나누고, 친교 시간도 가지면서 그들의 생활담도 들었다. 감사하고 흡족해한 그들을 볼 때 피곤도 잊고 보람도 느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는 성경의 말을 실감 했다.
 
남편이 전도하기 위하여 러시아인들을 집에 데려오면, 대접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고, 그들이 교회에 나오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교인 중에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이골'은 모스크바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한 친절하고 겸손한 청년이었다. 미국에 유학을 간 후에도 우리와의 사귐을 잊지 못하여 종종 편지로 소식을 알려왔다. 경제적으로 풍부한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교회가 그리웠던 것 같았다.
 
러시아 삶에서 또 보람되고 잊을 수 없는 것은 남편 선교사가 기독교 서적이 거의 전무했던 그 당시에 학생들과 교역자들을 위하여 노어로 '설교학' 책을 만드는 일이었다. 석사과정과 신학을 공부했던 고려인 이춘자 선생의 많은 도움이 있었다. 약 40일간 우리 집에 출근해서 작업을 함께 했는데 나는 점심준비를 해야만 했다. 공산치하에서는 없었던 기독교 출판사가 하나 생겨서 노어 '설교학' 교과서를 출간하게 되어 보람도 컸다.
 
대체로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민주주의의 자유를 내세운 옐친 대통령을 좋아한 것 같았으나 나이든 세대들 중에는 무료교육이나 평등의 삶을 주장했던 스탈린의 공산당 시대가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자본주의의 '자유'와, 공산주의의 '평등'의 적절한 조화가 우리 시대의 난제이며 과제가 아닐까? 우리가 러시아에 있을 때는 과도기여서 마피아들이 날뛰었고 특히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표적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우리가 아는 선교사들 및 학생들도 강탈, 생명의 위협 등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공산당 시대에는 모스크바가 수도가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수도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며, 특히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프랑스 루브르의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이다. 무진장한 예술품들이 소장되어 있어서 그저 놀랍고 감탄할 뿐이었다. 러시아에서의 3년 6개월의 생활은 긴장된 삶이였지만, 보람도 있었고, 러시아인들과의 사랑 나눔과, 풍부한 문화적, 역사적 삶을 조금이라도 체험했던 것은 특별한 은혜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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