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 볼리비아에서 태국으로

선교지 볼리비아에서 태국으로

[ 선교 ]

염신승 선교사
2014년 02월 24일(월) 17:06

   당초 선교사 파송을 받을 때는 총회에서 '선파송, 후교육'이라는 예외를 주셨다. 그래서 1992년 가을, 선교사 교육도 받고 아들 심장 질환 검진도 받기 위해 다섯 식구가 잠시 한국에 나왔다. 막대한 비행기 요금은 노량진교회에서 해주셨다. 정말 감사했다. 우선 급한 것이 아들 검진이었다. 병명은 '심장 심실 중격 결손'. 당장 수술하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선교사 훈련을 받고 아들은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수술을 위해서는 주님께 기도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노량진교회 림인식 목사님과 교우들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온 힘을 다해 기도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핏덩이를 살려주셨다. 아들은 회복 기간이 필요해서 한국에서 1년 동안 지내다가 볼리비아로 돌아왔다. 볼리비아로 돌아온 후 다시 선교사역에 몰두했다. 신대원 동기이자 선배 선교사님이신 조광호, 이옥주 선교사님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 그분이 세운 신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또 마약지대에 신학교 분교를 열고 교장 일을 했다. 하나님께서 귀한 땅을 주셔서 신학교 건축도 시작했다. 개척교회도 열매들이 맺혀지기 시작했다.

 개척교회는 달동네에서 처음 시작했고, 두번째는 평지에 개척했다. 교회 이름은 지역명을 따라 '알랄라이교회'로 했다. 첫 예배 드렸던 곳은 담도, 벽도, 집도, 방도 없는 길 모퉁이의 맨 바닥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는 게 아닌가. 그러다 술 취한 사람이 나타났고 그 사람을 붙들고 첫 개척 예배를 드렸다. 한 번은 그 교회 건축 전 부흥회 기간 중 그 땅바닥에서 보자기 위에 아기를 낳은 경우도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 교회는 선교 중심교회가 되어 매주일 신자가 늘어나고 믿음이 든든한 교회로 성장했다.

 서울로 치면 난지도 같은 곳에 '알또빠가도르교회'를 개척했다. 가난한 교인들이 열심히 건축을 도왔다. 눈물 겹게 감사했다. 여자 성도들이 점심을 준비했다. 점심이라고 해봐야 얇은 빵 하나에 멀건 감자국. 열 명 쯤 먹는 감자국인데 감자는 고작 다섯 알쯤 들어갔다. 그런데 그 감자를 깎는 교인 옆에 흙먼지 범벅의 양 한 마리 와서 감자껍질을 받아 먹는다. 그 교인에게 물었다. "왜 양을 키우느냐?" 곧 대답이 돌아오는데 '빠라 마따르'. 죽이기 위해서란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양은 주인을 위해 살다 죽임을 당한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과연 나는 어떤가? '내가 목자요 주인이신 예수님을 위해 죽어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님께서 뿔난 양처럼 못된 나를 위해 돌아가셨구나'라고 생각하며 멍하게 앉아 있던 그날이 기억난다.

 볼리비아에서 1990년 4월부터 12월까지의 무소속 선교사로, 그 해 12월부터의 1995년 12월까지의 5년 약정 총회파송 선교사로 사역했다. 그런데 앞으로 장기 선교를 계획하다 보니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그러던 중 한국에 들어갈 일이 생겼고 볼리비아 사역도 조금씩 마무리하기 시작했다. 후원교회에서는 지금까지의 사역을 중단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후임 선교사를 보내주셨다. 그동안 헌당예배를 드리지 못했던 교회들을 위해 노량진교회의 새 담임 목사님이 되신 강신원 목사님이 직접 오셔서 선교사 인수인계, 예배당 헌당예배 등을 집전해 주셨다. 우리의 첫 사랑 볼리비아와는 이렇게 아쉬운 이별을 했다.

 한국에서 선교를 위해 새롭게 준비하면서 새로운 선교지로 가기로 결심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한국에서 부목사와 담임목사로 사역하는 동안 6년에 걸쳐 학위를 마치고 아시아의 선교지를 찾게 됐다. 인도 선교사로 가는 거의 모든 준비를 마쳤는데 결국 인도가 막히고 생각지도 않던 태국으로 길이 열렸다. 볼리비아를 떠난 지 8년만인 2004년 2월 3일, 우리 가족은 제2의 선교지 태국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본교단 파송 태국 염신승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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