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 튜드

멀티 튜드

[ 논설위원 칼럼 ] 논설위원칼럼

정명철 목사
2013년 06월 05일(수) 16:00

요즘 막장드라마의 전성시대이다. 병원에서 아기를 바꿔치기 하고, 시청자들은 살인범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는데 경찰들만 모르고, 멀쩡한 며느리를 정신병원에 가두고, 불륜이 서로 엉킨 가족 등 말도 안 되는 스토리이다.
 
그런데 시청자들이 이런 드라마를 보는 것은 이 이야기가 우리의 실제이야기요, 시대의 풍자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종영된 '돈의 화신'이 인기드라마였던 이유도 공권력을 믿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요, 사적처벌을 통해 법 위에 있는 자들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이야기가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권력은 긍정적으로 사용될 수도, 부정적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 권력에는 책임이 있고 의무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주시면서 책임과 의무를 동시에 주셨다. '무식한 자가 신념을 가지면 무서워진다'는 말이 있다. 유치한 권력의지를 가질 때 권력은 폭력이 된다. 권력은 탐욕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권력의 탐욕은 계속해서 모든 것을 장악하고 지배하려고 한다. 만족함이 없다. 이것이 사탄의 영이 하는 일이다. 성경에 나오는 아합왕은 당시 가장 부유하고 힘이 있는 강력한 통치자였다. 수 많은 재산과 포도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게 되었다. 이와 함께 연대한 것이 아내인 요부 이세벨이다. 이세벨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위증을 하게하고 나봇을 고소하여 돌로 쳐 죽이는 사형을 당하게 만든다. 이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항한 사람이 엘리야 선지자이다. 엘리야는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는 곳에서 아합왕의 피도 핥을 것이고, 요부 이세벨의 고기를 개들이 먹을 것이라고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탐욕은 우상숭배이다. 그래서 성경은 제 십계명에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도 부자에 대하여 경고하시면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부자가 가지는 부에 대한 탐욕을 경계한 말씀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온통 권력에의 탐욕만이 보인다. 소위 권력중독이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불과 몇 년전부터 한국교회가 급속도로 바뀌고 있다는 이야기들을 걱정스럽게 한다.
 
기독교는 원래 가난한 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예수님은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의 정치적인 구조에 맞서 싸우며 복음을 전파하시다가 당시 부패한 종교권력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예수님은 돌로 떡을 만드시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요구를 거절하셨다, 내게 절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겠다는 사탄의 제의에도 거절하셨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의 어떤 지도자들은 돌로 떡을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감투 하나 받는다면 영혼이라도 팔아먹을 것처럼 달려간다. 갑자기 정치화되고 권력화된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오늘의 막장드라마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한국교회를 더 이상 막장드라마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성경이 말씀하는 권력은 섬김의 자리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복종하는 자리이다. 불의한 권력이 서로 만났을 때에 서로 연대하며 더욱 공격적성향의 권력을 만들어 가게 된다. 무소불위의 권력에는 자체정화력이 없다. 그래서 여기에는 적절한 제동장치가 필요하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미셸 푸코는 '멀티 튜드'(Multitude)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멀티튜드'란 억압하는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모델이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수의 집단이 일시적으로 사안적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권력에 대항하고는 다시 흩어지는 것이다. 멀티튜드의 장점은 정보와 권력을 움켜쥔 소수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다양한 다수가 힘을 발휘하는 미래사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멀티튜드는 사회적 운동의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굳이 멀티튜드가 아니더라도 오늘 우리 모두는 한국교회를 향한 기도의 촛불을 들어야 할 때이다.

정명철 목사 / 도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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