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빨리 vs. 차근차근

빨리빨리 vs. 차근차근

[ 데스크창 ] 데스크창

안홍철 기자 hcahn@pckworld.com
2013년 05월 06일(월) 15:31
야간통행금지(통금)를 기억하시나요? 통금을 아시는 분들은 어느덧 오십 중반이 넘은 나이가 됐을만큼 이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제도가 되었습니다. 통금은 싸이렌 소리와 야경(夜警)꾼의 호루라기 소리로 기억됩니다. 60년대 흑백영화를 보면 이 야경꾼들이 통금시간이 되면 호루라기를 불거나 딱다기를 쳤지요. 딱다기란 캐스터네츠(castanets)처럼 치면 '딱'소리가 나는 나무토막입니다.
 
까까머리에 흑색 교복을 입은 학생 시절, 성탄절이나 연말연시와 같이 통금이 일시 해제되는 날 종로 보신각이나 명동ㆍ광화문 일대를 밤새도록 신나게 친구들과 걸어다녔습니다. 이 날 만큼은 야경꾼도 쉼을 얻지 않았을까요?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 이 야경꾼이 등장합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원 때문에 십원 때문에 일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원 때문에.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시인은 독재권력에 저항한다 하면서도 구청이나 동사무소 직원한테는 말 한마디 못하고 고작 밤 순찰을 도는 야경꾼에게 옹졸하게 화를 내는 모습을 통해 당시 지식인들의 무능함을 자성합니다.
 
사실 통금은 조선시대부터 실시됐습니다. 경국대전에 보면 "궁성문(宮城門)은 초저녁에 닫고 해가 뜰 때에 열며, 도성문(都城門)은 인경(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오경)에 연다. 2경 후부터 5경 이전까지는 대소인원은 출행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광복 후의 통금은 1945년 9월 군정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지속되다가, 1954년 4월 1일 '경범죄처벌법'으로 규정하면서부터 법제화됐습니다.
 
이 제도의 전면 해제 건의안이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가결된 것은 1981년이었고, 1982년 1월 5일 국무회의에서 경기·강원 두 도 안의 휴전선 접적(接敵)지역과 해안선을 낀 면부(面部)를 제외한 전국 일원의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습니다. 전면적인 통금 해제는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1월 1일부터 시행됐습니다.
 
근현대사가들은 "통금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의 자유가 박탈당했다"고 말합니다. 일본제국주의의 감시와 처벌 방식이 통금제도로 답습돼 '식민지 국가폭력'이 해방 후에도 사회 전반에 지속되었고, 이후 냉전체제 안에서 국가안보와 치안유지라는 명분 아래 점차 국가가 제도적으로 개인의 신체와 시간을 통제했다는 것입니다. 통금은 한국 사회 안에 '빨리 빨리' 문화, 새치기, 성장지상주의 등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입니다.
 
과거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사건은 '빨리빨리'문화에 빠져 있던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정도를 거부하고 지름길을 좇는 것은 이처럼 큰 폐해를 낳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온전한 십자가 복음을 품지 않은 채 오직 성장과 부흥에만 매몰돼 세속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경영하기에 오늘날 한국교회는 위기를 맞은 것이 아닐까요? '빨리빨리' 결과만 중시할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과정과 절차를 중시할 때 우리는 이 광야를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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