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CC=공산주의?' 발원지는 어디인가(下)

'WCC=공산주의?' 발원지는 어디인가(下)

[ 선교 ]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3년 04월 26일(금) 10:32
"WCC 반대의 허구성을 해부한다" ②
 
1950년 WCC, 북한의 남침 규탄 성명 발표
그러나 당시 정부, 진실 여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용공' 낙인
에반스톤 총회 참석하려던 '한경직 목사 여권 미발급' 일화 유명
 
   
▲ 한국교회 대표인 한경직목사가 참석하지 못한 가운데 열린 WCC 제2차 에반스톤 총회(1954년 미국).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둘러싼 용공 논란은 초창기부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지루한 꼬리표다. 1951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년이 지난 즈음 우리나라 국회에서 한장의 성명서가 발표된다. 국회의원 25명이 참여한 가운데 발표된 당시 성명서는 WCC가 용공단체이고 그 회원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도 용공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목사이면서 2대 국회의원이었던 이규갑은 '기독교와 용공정책'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해 정계와 교계에 배표했다. 훗날 대한기독교반공위원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기독교를 배경으로 반공운동에 투신했던 이규갑은 당시 이 같은 주장을 펼쳤다.
 
"한국 기독교 각파와 각 단체가 한국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해 용공정책을 주장하는 세계기독교연합회(WCC)와 동아시아대회에 가맹연결된 것과 공산정책을 예찬하는, 또는 관장하고 있는 세계기독교연합회로부터 구제금품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동 단체와 자매관계를 가진 국제선교회(IMC)의 원조 받는 일도 진중한 사고를 경요(敬要)하와..."

결국 이규갑은 WCC와 현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의 전신이 되는 동아시아대회(EACC)까지 용공으로 매도하는 놀라운 주장을 펼쳤고, 국제선교협의회(IMC)가 보내는 원조도 받아서는 안된다고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한국기독교연합회(NCC, 당시 총무:유호준)는 신속히 입장을 발표했다. NCC 대변인은 "소책자를 보면 미국 내에서 WCC와 IMC와 대립해 싸우고 있는 ICCC에 소속한 모파의 모략에 의한 선전인 것 같다. 그나마도 미국 내의 어떤 잡지에 발표된 편파적인 문서를 재료로 미국 내 극소수의 보수주의자를 제외한 전 세계 150여 교파의 연합기구인 WCC와 현재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는 장로교, 감리교, 구세군, 성결교를 위시한 각 교파 선교회의 세계적 연합체인 IMC를 일방적으로 용공정책을 주장하느니, 예찬하느니, 권장하느니 하여 용공단체로 규명하는 것은 경거망동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한반도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1951년,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WCC를 반대한 이유는 뭘까. 이 단서는 당시 NCC의 대변인의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NCC는 대변인 발표를 통해 ICCC를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장신대 정병준 교수는 '세계교회협의회를 향한 비판의 근거에 대한 역사적 고찰' 제하의 논문에서 한국 정부와 ICCC의 '묘한 관계'에 대해 기술한다.

"이 사건의 배후에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측근 교계인사들이 있었다"고 밝힌 정 교수는 "피난지 부산에서 이 대통령은 송상석 목사와 이규갑 목사 등을 불러 세계교회협의회의 용공정책에 관한 소책자를 주면서 한국교회도 세계교회의 용공적 움직임에 주목하고 대처해야 할 것을 요청했다. 이규갑은 이 소책자를 번역해 배포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소책자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준 장본인이 바로 칼 매킨타이어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미국 선교사였던 치솜이 한국 국회의원들의 WCC 비난 성명서를 번역해 (칼 매킨타이어가 만든 잡지) 크리스찬 비콘에 게재했다. 당시 치솜은 정부 방송국에서 정기적으로 30분 간 종교방송을 했고, 칼 매킨타이어 등이 내한해 이승만과 만난 후 정부 간행물에 그들의 활동을 보도했던 친 정부 선교사였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과 칼 매킨타이어 사이의 가교역할을 치솜 선교사가 했고 이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칼 매킨타이어의 주장을 여과없이 한국에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반WCC 세력과 한국 정부 사이에 밀월이 시작되기 1년 전인 1950년 7월에 이미 WCC는 '한국 상황과 세계질서에 대한 성명'을 통해 "북한군의 남침에 대처해 유엔이 한국에서 경찰행동을 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이 일로 WCC 안에서는 공산국가의 교회들과 자유진영의 교회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벌어졌고, 급기야 당시 중국교회 대표였던 조자신은 이 성명서에 불만을 품고 WCC 중앙위원직을 사임해 버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처럼 WCC는 내부에서 심각한 갈등상황을 예상하고서도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지만 정작 ICCC를 위시한 미국의 일부 보수세력들은 사실과 다른 주장들로 'WCC가 용공'이라고 매도했고 불행히도 이런 거짓선전이 고스란이 우리나라로 전해지고 만 것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반WCC-친ICCC' 기조는 이후에도 수 차례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한경직 목사 여권 미발급 사건'은 유명한 일화다. 한국교회는 1954년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린 WCC 2차 총회 대표로 한경직 목사와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김현정 목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지만, 정부가 한 목사에게 여권을 발급하지 않아 결국 참석을 못하게 됐다. 반면 같은 해 7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ICCC 2차 대회에 참석을 하기 위해 여권을 신청한 고신 총회 소속 목사 4명은 무사히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WCC를 둘러싼 용공논란은 그 진실여부와는 전혀 관계없이 일방적인 낙인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특히 역사가 흘러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모두 붕괴되면서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념이 되어버린 지금까지도 WCC를 용공으로 매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면에서 WCC에 대한 용공시비는 이제 종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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