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기'와 '하기'

'되기'와 '하기'

[ 논설위원 칼럼 ] 논설위원 칼럼

이의용 교수
2013년 04월 16일(화) 16:35

가깝게 지내는 교우 가족과 식사를 함께 하였다. 마침 그 집 딸이 교생 실습을 다녀온 일이 화제에 올랐다. 순간, 옛날 교생 실습하던 추억이 떠올라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실망스러운 얘기부터 꺼냈다. 선배 교사들이 '뭐 하러 교사를 하려느냐?'며 교사 지원을 말리는 바람에 교사가 되려는 꿈을 접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다. 참 씁쓸했다.
 
우린 아이들에게 "너 이 다음에 커서 무엇이 될래?"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 그래서 아이들은 대통령, 장군,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책상 앞에 써붙이고 공부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된 다음에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이 되느냐(What to be)에만 관심이 있지, 무엇을 하느냐(What to do)에는 관심이 없다.
 
전자가 '직(職)'이라면 후자는 '업(業)'이라 할 수 있다. '업'보다 '직'을 중시하니 '자리', '권력', '대우' 등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대우와 조건만 보고 지원을 하는 청년 취업자가 적지 않다. 그 일이 어떤 일인지, 자신의 적성과 비전에 맞는지는 그 다음 일이다. 그러니 일에서 보람을 찾기가 어렵고, 대우나 조건이 달라지면 쉽게 그 자리에서 나오려 한다.
 
고위 공직자 청문회를 볼 때마다 안타깝다. "왜 저 자리에 나와 저런 망신을 당할까?", "저런 망신을 당하면서도 왜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주고받는 질문과 답에서 "왜 공직자가 되려는가?", "공직자가 되어서 무엇을 하려는가?"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제자직 외에 '수석제자' 같은 보직을 주지 않으셨다. '제자 1년차', '제자 2년차'로 서열을 조정하지도 않으시고 사역에만 집중하셨다. 그럼에도 오늘날 교회, 노회, 총회, 교계는 여러 자리를 만들어놓고 서열을 매겨 놨다. 그 바람에 더 높은 자리, 대우가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헐뜯고 싸워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심지어 은퇴 후에도 싸움판에 끼어들어 노욕을 부리기도 한다. 그만큼 누렸으면 이제 그만 '퇴장'하면 좋으련만…. 과연 서열과 대우가 없어도 자리 싸움을 할까? 어떠한 목사가 되고 어떠한 장로가 돼서 어떤 일을 하려는지는 준비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오르려고만 하니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직'이란 어디까지나 '업'을 위해 필요한 자리다. 무엇이 되느냐보다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자리'가 아니라 '일'에 우리를 부르신다. '성직(聖職)'과 '세속직(世俗職)', '천직(天職)'과 '천직(賤職)'이 따로 있지 않다. '부르심(Calling)' 없이 'What to be'를 추구하면 어떤 직업이든 세속적이고 천한 자리가 되고 만다.
 
대학도 '자리'나 지키려는 안일한 교수들로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아파하는' 청년들을 바로 세우고 회복시키려는 '순진한' 교수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교사직이나 교수직 모두 사명감이나 열정은 제쳐두고 우수한 지능만 중시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그에게, 왜 교사가 되려는지 깊이 생각해보라고 했다. '부르심' 없는 직업은 그 어느 것도 보람을 주지 못한다, 청소년들을 바로 세우고 살리는 일에 사명감과 열정을 느낄 때 교사직에 도전하라고 했다. '어떠한' 교사가 되어 '어떤' 일을 하려는지를 먼저 자문해보라, 그것이 명확해질 때 주님께서는 그 일을 할 자리를 주실 것이라고 했다.

이의용 교수 / 국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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