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새벽

그날 새벽

[ 데스크창 ] 그날 새벽

안홍철 기자 hcahn@pckworld.com
2012년 11월 21일(수) 09:04
"새해를 하루 앞 둔 섣달 그믐날의 추운 거리를 한 굶주린 성냥팔이 소녀가 모자도 없이 맨발로 추운 거리를 걷고 있었다. 성냥을 팔지 못하면 집에 돌아갈 수도 없는 소녀는 건물 벽에 기대어 주저앉고는 꽁꽁 언 손을 녹이기 위해 성냥 한 개비를 그었다. 그러자 빨갛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온갖 환상이 소녀 앞에 나타난다. 첫번째 성냥은 큰 난로가 되고, 이어서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식탁, 그리고 예쁜 크리스마스 트리가 나타나는데, 크리스마스의 트리에 달린 불빛은 높은 하늘로 올라가 밝은 별이 되었다. 그 불빛 속에 그리운 할머니가 나타나자 소녀는 자신도 그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소녀는 할머니를 계속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 남은 성냥을 몽땅 써버린다. 그러자 사방은 밝아지고 소녀는 할머니에게 안긴 채 하늘 높이 춤을 추며 올라간다. 추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자 소녀는 미소를 띤 채 죽어 있었다. 그러나 소녀가 어떤 아름다운 것을 보았는지, 얼마나 축복을 받으며 할머니와 함께 즐거운 새해를 맞이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이 1845년에 발표한 '성냥팔이 소녀'의 내용입니다. 안데르센이 가난한 소녀 시절을 보낸 어머니를 모티브로 쓴 작품인데 성냥불 속에 나타나는 장면은 작가의 상상이지만 평론가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신앙으로 해석합니다.

며칠 전에도 노숙인 한 분이 동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뉴스를 접할 때 마다 '성냥팔이 소녀'가 오버랩되면서 가슴이 답답해집니다. 입김이 차갑게 나오는 이 계절, 실제로 서울역, 청량리역, 영등포역 주변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청난 수의 노숙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신문지 두장에 의지해 잠든 사람들, 간 밤의 취기가 아직 덜 풀려 핏발 선 눈빛으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행패 부리는 사람들, 한 쪽 구석 메마른 시멘트 벽에 기대어 떠나온 집과 가족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 "그날 새벽에 봤던 대우빌딩을 잊지 못한다. … 거대한 짐승으로 보이는 대우빌딩이 성큼성큼 걸어와서 엄마와 외사촌과 나를 삼켜버릴 것만 같았다."

소설가 신경숙씨의 자전적 소설 '외딴 방'의 한 부분입니다. 1970년대 말 상경한 열여섯살 시골소녀가 서울역에 내려서 맨 처음 본 건 거대한 대우빌딩(현 서울 스퀘어빌딩)이었습니다. 넓은 들만 보고 자란 소녀에게 하늘 높이 치솟은 콘크리트 빌딩은 위압적이었습니다. 그때의 충격을 그녀는 '거대한 짐승'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70년대 도시 산업화 속에서 거대 기업들에게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작은 이'로 살아가는 도시빈민 근로자들의 처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서울에 온 그날 새벽 처음 목도한 대우빌딩을 잊지못했다는 여류작가의 말을 떠올리며 한국교회는 "그날 새벽에 봤던 노숙자를 잊지 못한다" "그날 새벽에 봤던 작은 이를 잊지 못한다" 는 고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고백은 결국 "그날 새벽에 만났던 주님을 잊지 못한다"는 고백이 될 것이기 때문이죠.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과연 누구였는지 생각해 보면 이 시대 제사장이며 레위인인 한국교회가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