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장미의 이름으로

영화-장미의 이름으로

[ 말씀&MOVIE ] 영화-장미의 이름으로

최성수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8월 28일(화) 10:21
[말씀&MOVIE] 장미의 이름으로(장-자크 아노,스릴러,청소년관람불가,1989)

폭염의 열기도 식고 이제는 가을이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 된 까닭은 아마도 그동안 더위로 지쳐 책을 읽을 기회를 갖지 못했기에 더욱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독서야 계절을 가리지 않아야 할 일이지만, 어둠 속의 빛이 더욱 밝게 빛나는 것처럼, 가을은 폭염으로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책들이 눈에 밟히는 계절임에 분명하다.
 
독서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고민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할 것인가 이다. 좋은 책을 소개해달라며 상담해 오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느끼는 점이 하나 있다. 신앙에 유익한 책을 찾는 것은 모두가 공통적인데, 혹시 부족한 신앙에 잘못된 책을 읽으면 혼돈을 가져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많다는 것이다. 청소년도 아니고 성인들이 갖는 그런 염려는 그동안 독서의 폭이 넓지도 또 깊지도 않은 결과이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들의 독서가 주로 신앙서적, 그것도 간증이나 설교집에만 제한되어 있는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기독교에게 타자로 여겨지는 사람들과 이들의 생각을 담은 책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이 오히려 신앙을 폐쇄적으로 만들거나 혹 나약하게 하거나 병들게 하지는 않을까? 타자를 이해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나마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인 독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결코 두려워할 일만은 아니다.
 
사실 두려움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책은 읽는 자에게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려워하는 사회에서, 특히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폐쇄적인 사회에서 책은 늘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작성된 금서 목록들을 일별해보면 당대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금서는 당대의 염려와 두려움의 표현임에 분명하다. 심지어 '불노초'와 '불사약'으로 영생하고자 했으나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중국의 진시황은 정치적인 적대세력의 비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로 소위 '분서갱유'를 감행했다. 의약, 점복, 농업에 관한 책을 제외한 모든 책들을 불사르고 비판적인 학자들을 죽인 사건이다. 분서갱유 사건은 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교회의 역사에서도 예외는 아닌데, 움베르토 에코가 쓴 소설이며 이성의 암흑기로 알려진 중세, 1327년 이탈리아 북부의 한 수도원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장미의 이름으로'는 이성보다 신앙을 우선시하는 당시의 세계관에서, 특정한 책에 대한 두려움을 소재로 다룬 소설이다. 영화는 에코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제작되었다. 영화는 성격상 비록 소설의 많은 부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지만, 소설이 주는 추리의 긴장감은 제대로 살렸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기호학자와 미학자인 에코의 능력이 십분 발휘된 명작이다.
 
내용의 핵심은 의문의 연쇄적인 죽음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 겉보기에는 신앙과 이성의 갈등으로 보인다. 수도원 측에서는 마귀의 소행으로 믿고 마녀사냥 식의 종교재판을 신뢰하는 데 비해, 전직 종교재판관인 윌리엄(숀 코너리 분)은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단서들을 문제해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 기호로 여기면서 합리적인 방식으로 추리해 나간다. 결정적인 단서는 사망자 전원에게서 동일하게 발견된 흔적이었는데, 손가락 끝과 혀에 검은 잉크가 묻어 있는 것이다. 이것이 책을 넘기는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짐작한 윌리엄은, 일련의 사건들이 서가 안에 숨겨진 책의 비밀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확신하지만 수도원 측의 방해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다. 양피지에 기록된 각종 기호들의 단서를 풀어가면서 윌리엄은 마침내 미로로 연결된 서가에서 문제의 숨겨진 책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며, 수도원의 영적 지도자 한 사람이 그 책에다 독을 묻혀 놓아서 그 책을 보는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문제는 노 수도사가 왜 그토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금기시했는가 하는 것이다. 에코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중세의 암흑기를 염두에 두면서 희극에 대한 교회의 금기를 대표격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보존하는 데에 있다고 믿으며, 또한 웃음이 신앙의 진지함을 위협한다고 확신하고 노 수사가 학자들이 시학을 읽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의미와 필요성을 밝힌다면 신앙에 적지 않은 위기가 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고 취한 조치였다. 이런 내용은 자칫 잘못하면 교회와 수도원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실제로 그런 염려 때문에 교황청과 마찰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아마도 시학의 일부가 분실되어 오늘날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성찰하면서,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독서에는 신앙의 지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전염성이 가장 강하고 또 오래토록 지속하는 것이 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서의 범위를 성경이나 신앙서적에만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어디에나 존재하는 타자를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를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독서의 폭은 넓어지고 깊어질 필요가 있다. 예컨대, 현재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불자들의 글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불자의 글이라도 그들의 사상을 두려워해서 피하기보다는,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불자들과 독자들을 이해하며 소통할 수 있기 위해서도 읽을 수 있다. 독서의 계절인 가을, 이성과 책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갖고 폭넓은 독서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최성수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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