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뉴델리 총회(1961년)

제3차 뉴델리 총회(1961년)

[ 선교 ] 에큐메이칼 서당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2년 02월 14일(화) 14:48
1960년대는 국제무대에서 제3세계 비동맹 운동이 성장하면서 아시아의 영향력이 커졌다. 또한 아시아 에큐메니칼 운동의 성장은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1973년 싱가폴 총회에서 CCA로 변경)의 결성으로 나타났다. 서구권 밖 최초의 WCC 총회는 인도를 선택했다. 3차 총회에는 197개 회원교회에서 5백57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이때 4개의 동방정교회(러시아,루마니아,불가리아,폴란드)와 18개의 신생교회(아프리카 11개,아시아 5개,남미 2개)와 2개의 오순절교회가 가입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격랑이었다. 1955년에 나토에 대응하는 동구권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결성되고 세계가 미소 양대 블록으로 재편되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비동맹회의를 결성하면서 제3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1956년에 스탈린은 헝가리의 자유혁명을 진압했고,영국과 프랑스도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를 강점했다. 1957년 가나가 영국 연방에서 독립하며 아프리카 민족독립의 선봉이 됐다. 1959년엔 쿠바가 혁명에 성공하면서 미국에 도전하기 시작했고,이듬해인 1960년엔 남아공 정부가 샤퍼빌에서 흑인들을 대량 학살했고 이와 동시에 WCC의 인종차별 반대 프로그램이 가동됐다. WCC는 1955년부터 10년 동안 일어난 이스탄불 내전의 피해 복구를 지원했고,소련의 헝가리 침공 때에는 난민들의 이주 정착을 지원했다. 그리고 1958년에 WCC와 러시아 정교회 사이에 대화와 방문이 활성화 됐다. 이러한 봉사와 대화는 4개의 동방정교회가 WCC에 가입하는데 중요한 배경이 됐다. 1958년 가나에서 열린 '국제선교협의회'(IMC)는 WCC와의 통합을 결의했다. 1960년 WCC 중앙위원회는 WCC 헌장을 개정하고 에큐메니칼 운동에 성서적이고,복음적이고 삼위일체적 근거를 제공했다.

3차 총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세상의 빛'이었다. 뉴델리 총회의 주제는 신앙고백과 아시아를 함께 고려해 결정했다. 뉴델리 총회에서는 WCC 헌장의 확대수정과 IMC와 WCC의 통합,동방정교회의 가입, 로마 가톨릭의 옵저버 참석 등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담을 수 있는 넓은 개념이 필요했고 '세상의 빛'이라는 개념이 선택됐다. 에반스톤 총회의 주제는 '그리스도'를 사용했으나 뉴델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용한 것은 당시에 WCC를 향해 '신학적 상대주의' 혹은 '혼합주의'라는 비난이 컸기 때문이다. 이 주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요청을 암묵적으로 담고 있었다. 예수님의 빛은 십자가라는 고난과 수치에 가려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부활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교회도 십자가를 짐으로 주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증언을 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1차와 2차 총회는 '비교교회론'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뉴델리 총회는 최초로 '가시적 교회론'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총회는 교회일치의 목적이 "각 처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시적 일치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풀뿌리 에큐메니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다른 한편 독일의 루터교 신학자 요셉 지틀러는 최초로 '우주론적 기독론' 개념을 사용해서 교회 일치를 주장했다. 그는 계몽주의 이후 은총에 대한 개념이 자연을 배제한 채 인간의 역사와 도덕의 영역으로 한정되었다고 비판하면서,교회일치와 자연구원의 길을 연결시켰다. 이것은 훗날에 나타나게 되는 '창조신학'의 전도가 되었다. 또한 동방정교회 신학자 니시오티스는 동방교회의 '존재론적 교회론'을 WCC에 처음 소개했다. 분과토론에서는 최초로 종교 간 대화가 강조됐다. 또한 신생교회의 정치와 경계,사회문제를 직면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하면서,인류애와 신앙적 실천은 구분했다. 그리고 어떤 (정치적) 체제 안에서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에 복종할 수 있다고 하여 이념과 신앙을 구분했다.

(자문:서울장신대 겸임 정병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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