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분열을 회개하고 일치를 추구하다

교회 분열을 회개하고 일치를 추구하다

[ 선교 ] WCC 1차 총회

장창일 기자 jangci@pckworld.com
2012년 01월 03일(화) 16:14
*신년부터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열린 WCC 1차 총회부터 2006년 브라질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열린 9차 총회까지의 주제와 논의됐던 주제들을 비롯해서 한국교회의 참여 등 전반적인 역사를 점검한다.

1948년에 열린 1차 암스텔담 총회에는 1백47개 회원교회에서 3백51명의 총대들이 참석했다. 당시는 주로 유럽과 북미교회들과 소수의 동방정교회 대표들이 참석했다. 당초 첫 총회는 1938년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에서 WCC 창립을 결의한 후 열 예정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무기한 연기됐다. 결국 WCC는 10년이 지난 48년이 되어서야 창립 총회를 열게 된다.
 
이처럼 세계교회협의회의 창립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일이 아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개신교회들은 교회일치를 위해 노력한 결과 '국제선교협의회'(IMC)와 '삶과 일'(Life and Work),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등 세개의 기구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진정한 일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일치와 봉사를 통한 일치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에 공감하고 1938년 '신앙과 직제'와 '삶과 일'의 대표들이 모여 WCC를 창립하기로 결정하고 헌장을 작성했다. 하지만 곧 발발한 2차 세계대전은 서구교회들의 일치에 대한 낙관론에 찬물을 끼얹었다. 전쟁으로 분열된 교회 공동체의 무기력함을 확인한 지도자들은 세상을 화해시키고 공동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선 먼저 교회의 일치가 우선임을 확인하고 WCC 창립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
 
이 같은 역사적인 배경으로 만들어진 WCC 창립 총회의 주제는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섭리'(Man's Disorder and God's Design)로 당시 에큐메니칼 운동의 핵심적 과제인 '재건'의 의지를 담았다. 1차 총회에서 교회 대표들은 오직 하나님의 섭리만이 인간의 무질서를 해결할 수 있고, 교회는 하나님의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만 교회가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WCC는 교회가 분열을 회개하고 자기갱신을 통해 일치를 추구할 것을 강조했다. 1차 총회 주제에는 인간의 교만함을 지적하면서 어떤 문명과 교회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유하지 못하다는 바르트 신학이 나타났다.
 
초기 WCC의 교회론은 기독론 중심적인 '비교 교회론'이었다. 비록 교회들은 분열되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일치가 있고 그것을 서로 확인하기 위해 '함께 모이자'는 것이었다. 총회에서는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됐다. 총회 1분과(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보편적인 교회)는 앞서 말한 교회일치를 다뤘고,2분과(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교회의 증언)에서는 선교론을 논의했다. 3분과(교회와 사회의 무질서)는 교회의 윤리적 책임을 다뤘는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된 세계에서 그 대안으로 '책임사회'를 제시했다. 마지막 4분과(교회와 국제적 무질서)는 국제적인 문제들을 다뤘는데 특히 체코의 신학자 로마드카와 미국의 국무장관 덜레스 사이에 치열한 이념적 논쟁이 있었다.
 
한편 한국교회는 창립총회 때부터 WCC 회원교회로 참여했다. 여기에는 비사(秘史)가 있다. 창립 총회를 열기 위해 한해 전인 1947년 모인 '총회 준비를 위한 임시위원회'는 신생교회 대표로 6명을 지명한다. 이중에 존 모트와 가까웠던 감리교회의 변홍규목사가 지목된다. 하지만 NCCK의 전신인 조선기독교연합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김관식목사를 한국대표로 선정해 파송한다. 결국 두명의 한국교회 대표가 1947년부터 WCC 창립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이듬해인 1948년 WCC 1차 총회에는 당시 갈등을 겪고 있던 감리교회 대표들이 참석하지 못하고 예장의 김관석목사와 청년대표 엄요섭목사가 참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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