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회 성장의 숨은 기여자  

1. 교회 성장의 숨은 기여자  

[ 특집 ] 9월 특집 - 한국교회 역사와 대형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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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9월 02일(목) 10:04

정장복 / 한일장신대 총장ㆍ한국기독교학회장

복음의 확산, 치유와 화해의 파노라마

1884년 이 땅에 복음이 상륙한 이후 우리의 교회는 선교의 기적이라 일컬을 정도로 급성장을 기록했다. 여기에는 한국에 세계교회의 촛대를 심기 위한 성령님의 특별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사의 역동적인 결실들은 대성회들을 통하여 우리 앞에 전개되었고, 그 결실은 오늘의 교회성장과 직결되는 결실을 낳았다.

또한 지난 8월 15일에 열린 8.15 대성회가 보여 주었듯이 대형집회는 한국교회의 보수와 진보가 연합하는 좋은 결과를 남기기도 했다. 이번 대성회의 뿌리를 1907년부터 한국교회가 경험한 대성회를 비롯하여 기타의 성회에 두면서 1백만이 모이는 대성회를 기획하고 추진하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 역사 뿐만 아니라 한국역사와 함께 해 왔던 대형집회를 실천신학자의 입장에서 살펴 보고자 한다.

1. 1907년 평양의 대각성 부흥
평양의 대성회는 한국교회를 깨우는 대각성의 성회였다. 미국에서 1906년 오순절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 그 출발이 방언을 중심한 은사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성령님의 역사에 의한 그리스도인들의 참회가 그 주종을 이루었다.

1903년 원산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 하디를 통한 부흥운동의 태동이 1907년 평양의 장대현 장로교에서 불길로 치솟았을 때, 한반도의 교회는 새로운 태동을 하면서 그 불길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그리스도인들보다 한 수 위의 그리스도인들로 보였던 성숙한 백인들과 유아기에 머물고 있었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런 차별이 없이 하나님 앞에 한 자녀로서 서로가 얽혀 참회의 고백과 눈물을 쏟아냈던 매우 특수한 면을 보였던 성회였다. 둘째로, 재래종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소원성취와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가져오는 종교의 일반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본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한 참회의 운동은 구원의 종교로서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인하였다. 셋째로, 그리스도인들로서 교회의 가치성을 새롭게 인식하며 나선 복음의 확산은 과거와는 다른 속도로 전개되었다. 넷째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시급한 과제로 여겼던 한국교회는 이 성회를 통해 얻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 은혜를 새롭게 깨달으면서 한국교회는 사역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2. 1973년 빌리 그래함의 전도집회
한국에 복음을 전해주었던 미국교회 역시 1720년 미국의 제1차 대각성부흥운동(The Great Awakening Movement)이 있었고, 81년이 지난 1801년 제2차 대각성의 불길이 다시 일기 시작했었다. 한국에서도 매우 비슷한 기록을 보게 된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정신과 마음과 삶으로 하나님을 향하게 했던 제1차 대각성부흥운동이 65년이 지나는 동안 한국교회가 존재한 삶의 터전은 실로 격변의 장이었다. 일제의 잔인한 36년의 식민지 생활을 비롯해 광복과 함께 몰아온 혼돈과 무질서, 동족살상의 6.25 전쟁으로 인한 초토화된 상처, 1960년의 4.19혁명과 1961년의 군사혁명 등으로 우리나라는 회오리바람에 이리저리 밀리면서 실로 험악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 민족이 미래를 향하여 새롭게 발길을 내딛고 무엇인가 해보려고 일어설 무렵, 하나님은 이 땅에 빌리 그래함을 보내어 복음의 정착과 확산을 위한 씨앗을 뿌렸다.

먼저는, 이 성회가 그동안 한국인들이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 진한 상처투성이로 가득해 있을 때,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아끼고 장차 큰 비전을 안겨주시면서 사랑하고 있음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둘째로, 기독교를 순수한 구원의 종교로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었다. 셋째로, 이 전도성회는 10만의 새로운 결신자를 얻은 것에 끝나지 않고, 복음의 확산에 필요성과 사명감을 갖게 하여 전도의 불길을 당기었다. 넷째로, 이 성회를 기점으로 순수한 복음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한국교회에 복음주의에 입각한 활동들이 활성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사명의 자각과 봉사와 헌신의 결단을 통하여 선교의 열기를 일게 하였다.

3. 1974년의 '엑스플로  74대회'

   
▲ 1974년 개최된 '엑스플로 74'대회. 이 대회를 통해 27만여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가 한반도에 복음의 불을 질러 그 열기가 한창이던 다음해에 '엑스플로 74대회'가 열렸다. 이 집회는 1972년 미국의 CCC에 의해 63개국의 대표단이 함께한 10만 명이 달라스에 운집했을 때, 당시 한국대표단의 김준곤목사가 1974년의 'EXPLO 74'를 한국에서 유치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진행되기 시작했던 집회였다. 이 집회는 '예수혁명-성령의 제3폭발'을 주제로,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소서'라는 표어를 걸고 진행되었다.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 20만 명이 노방전도에 나섰으며, 27만 2천여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는 기록은 전도의 열정이 어떠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하게 된다.

첫째는, CCC의 젊은이들이 마음껏 뛰면서 '오늘의 학원복음화는 내일의 민족복음화요, 오늘의 민족복음화는 내일의 세계복음화' 라는 표어를 걸고 1958년에 시작된 CCC가 대성회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빌리 그래함의 집회를 통하여 심어진 복음의 진수가 다시 반복될 때, 모두가 말씀 속에서 은혜를 진지하게 체험하는 집회로 그 성격이 분명했다. 셋째는, 이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이 천막과 학교 교실을 숙소로 삼고 받았던 전도훈련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헌신하는 결단들은 한국교회에 초유의 사건들이었다. 넷째로, 1973년과 74년에 이어진 전도집회의 결과는 한국 기독교의 성장에 놀라운 공헌을 가져왔다. 1975년에 약 4백만 명이었던 교인수가 6년 후인 1980년에는 7백60만 명이었다는 정부의 통계는 한국교회의 급성장을 잘 말해주고 있다.

4. 1985년 한국 기독교 선교 1백주년 대회
한국에 복음이 상륙한지 1백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진행되었던 1985년의 1백주년 대회는 그 출발부터 앞서 살펴본 대형 집회가 목적이 아니었다. 1980년 한국기독교1백주년협의회가 구성되면서, 1984년 한국 기독교 1백주년을 앞두고 11개 교단 대표들이 모여 구상했던 것은 1백년 전 복음의 씨앗을 뿌리어 오늘에 이름을 감사하는 일이 우선적이었다. 그래서 모임은 1백년을 기념하는 감사예배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리고 개신교 1백주년의 역사를 맞아 분열된 한국교회에 새로운 화해와 일치의 방향 모색을 비롯하여 민족을 복음화하기 위한 전도운동 전개와 1백주년의 교회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센터 건립과 같은 기념사업에 역점을 두었다. 이러한 기념사업은 단회적인 대집회의 가시적인 효과보다, 실리적이고 장기적인 사업과 그 터전들을 구축하는 데에 그 특성을 찾게 된다.

5. 2007년 대부흥 1백주년 기념대회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형상을 저버린 삶에 예속되었을 때,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뜻밖에 경험했던 1백년 전의 대각성 부흥운동의 기록이 다시 한 번 재현되기를 희망하면서 본 대회의 문을 열었다. 'Again 1907'을 부르짖으면서 2007년 대부흥 1백주년 기념대회는 포문을 열었다. 이러한 소원은 이 기념대회가 한국교회의 대표적 연합행사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함께하여 25개 주요 교단이 참여하였다는 사실에서도 이 모임을 통한 영적인 새로운 변화의 바램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말해주고 있었다.

이 대회에서 설교자는 "주여 살려주시옵소서!"를 외치면서 한국교회가 사대교회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고 지적하며 참회와 영적 각성을 눈물로 호소했었다. 그러나 그 순간의 감격과 눈물과 열기는 단회적인 것으로 끝남으로 아쉬움만이 남게 되었다. 그 후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남긴 오점의 보도가 끊이지를 않고, 사회의 지탄을 받는 대상으로 한국교회가 늘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Again 1907'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3시간 넘게 이어진 이 대회가 대부흥 100주년을 축하하는 레이저 쇼와 화려한 불꽃 잔치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을 때, 1백년 전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눈물로 가득했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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