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카브코'를 꿈꾸다

'제2의 카브코'를 꿈꾸다

[ 아름다운세상 ] 종로5가의 기독교 문화 지도 새롭게 그려가는 '하다 소극장'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0년 08월 31일(화) 11:42

"오늘 재판은 원고 한국교회가 피고인 가야바, 본디오 빌라도, 가롯 유다를 상대로 상기 피고인들이 서기 30년에 하나님과 인류를 대역한 불의의 범죄를 고발한 사건으로 진행됩니다.(성극 재판정, 찰스 스티븐슨지음)"

   
▲ "저기 2층에 카브코가 있었다니까". 기독교회관 앞에서 담소 중인 배한숙목사(左)와 이현철대표(右).
이런 성극을 하는 교회가 아직도 있을까? 끝없는 아리아, 카타콤의 순교자, 그곳으로 가는 사람들, 인간의 욕망…. 지금은 희귀해진 성극의 제목들이다. 과거 기독교회관 2층에 위치했던 '카브코(KAVCO, 한국기독교시청각)'에 가면 이런 대본들을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굉장히 아쉬웠던게 어느 날인가 카브코가 없어졌어요. 우리나라에 제대로된 성극 대본도 없고 하던 초창기에 카브코가 있어서 대본이나 의상, 성극에 필요한 것들을 다 얻을 수 있었는데…." 지난 26일 하다 소극장 사무실에서 만난 이현철대표(을지로교회 집사)가 말했다. '카브코'? '카프카'를 잘못 들은건가? 대체 카브코가 뭐지?

한참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고 있는 중에 이 대표가 사무실 한켠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들고 오더니, 누렇게 색이 바랜 성극 각본들을 기자 앞에 펼쳐 놓는다. "여기 있는 작품들이 하다 소극장을 탄생시킨 거에요. 예전에 다 이 작품들로 교회에서 연극을 했었거든요." 하다 소극장은 지난 3월 '카브코'가 있었던 한국기독교회관에 1백40석의 규모로 개관했다.

기존의 지하창고가 있던 공간이 소극장으로 재탄생하기까지 리모델링에 들어간 2억여 원의 비용은 모두 이 대표의 사비로 충당했다. 그런데도 그는 "경제적인 부채는 생겼어도 마음의 부채는 오히려 덜었다"고 말한다. "교회에서 성극을 하다가 연극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만큼 이제 교회에 다시 돌려주고 싶어요. 그리고 후배들을 가르쳐야죠."

'하다'란 소극장의 이름은 '연극을 하다, 관객들과 소통하다, 복음을 전하다…'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행위' 자체를 지칭한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공간에 이 대표가 채워나가고 싶은 꿈의 빛깔도 그만큼 다채롭다. "2∼30년 전부터 소극장을 갖는 것이 꿈이었어요. 예전에 있었던 귀한 자료들을 찾고 싶고, 현대적 감각에 맞춰 각색된 성극을 올릴 수 있는 극단도 만들고 싶고, 크리스찬 연극인, 극작가, 연출가를 배출할 수 있는 연극학교도 열고 싶고… 대본 공모도 할거에요."

한마디로 이곳을 다시 기독교 연극의 중심지로 만들고 싶다는 얘기다. 그럼 제2의 카브코가 되는건가? 마침 하다 소극장의 사목인 배한숙목사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빛바랜 성극 대본들을 기증한 당사자라고 하니 반가움에 눈길이 그에게로 쏠렸다. 지난 5월, 10년간의 일본 선교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배 목사가 흔쾌히 사목직을 수락한 것 역시 카브코에 대한 향수때문이었다.

   
▲ 배 목사가 하다 소극장에 기증한 손때묻은 성극 대본들.

"지금은 왜 이런 대본들을 볼 수 없을까요?" "옛날 대본들을 보면 거의 번역본이에요. 선교사님들은 재정을 투자하면서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하셨는데, 지금은… 솔직히 이거 돈 되는거 아니잖아요. 허허허." 그래도 연극이 좋다는 배 목사의 말에 이 대표가 미소로 맞장구를 친다. "난 이것도 한 번 해보고 싶어." "전 이거요. 제가 중학교때 했던 성극이요." 과거를 회상하는 대화 속에 한 방향으로 맞닿아있는 두 사람의 꿈이 만나 강렬한 스파크를 냈다.

일반적으로 소극장에 사목이 있는 경우는 없다. 그래서 정형화된 역할도, 어쩌면 보장된 수입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배우들과의 성경공부, 신앙상담 및 기도, 극예배 등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장신대 '코이노니아' 연극부 시절 "배우하다가 사투리가 잘 안고쳐져서 연출을 했다"는 우스갯소리 속에 연극에 대한 '경상도 사나이'의 진지한 열정이 느껴졌다.

요즘 하다 소극장에는 손현미작가의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가'가 공연중에 있다. '하다'의 정체성을 드러낸 정통 기독교연극을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것. 8시 공연을 앞두고 한사람씩 배우들이 소극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극은 삶의 정화다." 사형수 정진수 역의 박상현씨의 말이다. "공연하면서 실제로 많은 생각을 해요. 평소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소소한 일상의 감사도 느끼고 앞으로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결심도 한답니다. 관객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연극이 무엇인지 답을 찾기 위해 죽을때까지 연극을 할 것 같다", "연극은 즐거움이다" 등 배우들은 저마다의 연극 철학을 꺼내놓았다. 배우 한승엽씨(강변교회)는 "교회내에 극단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는데 교회의 구성원들조차 극단이 왜 있어야 하는지 공감하지 못하기도 한다. 아마도 연극의 파급효과를 잘 모르시기 때문일 것"이라며 "롤랑 조페감독의 '미션'을 종교영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것처럼 연극을 통해 직접적인 신앙을 말하지 않아도 관객들이 이런게 믿음이구나, 기독교의 사랑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 현재 하다 소극장에서 공연중인 '마지막으로 할말은 없는가'의 배우들과 이현철대표.

교회에서 낭송극만 해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던 시절은 지났다. 문화적 혜택은 그만큼 풍부해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양적인 측면에서다. 자극적이지 않으면 대중을 매료시킬 수 없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 됐고 '연극'의 고뇌도 깊어졌다. 연극은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그 속엔 처방전이 있다. 겉모양은 화려하지만 속은 앙상한 현대인들의 정서를 치유할 수 있는. 도덕불감증 시대에 교회가 연극에 관심을 돌려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프(Off) 대학로',  '제2의 카브코' 무엇이 됐든, 종로5가의 문화지도를 새롭게 써내려가기 위해 첫걸음을 내딛은 '하다'의 다음 행보에 관심이 모아진다.

취재수첩
 "목사님들이 우리 작품을 많이 보러 보셨으면 좋겠어요."
 취재중 연극계에서 가장 유력하다는 S극단을 지원하고 있는 것이 어느 유명 사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불교 재단의 대학에 인지도높은 연극영화과가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는 일이다. 그 S극단에서 주관하는 공연의 마지막날에는 해당 사찰의 주지승려가 무대에 올라와 관객들로부터 인사를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로에 불교를 소재로 한 연극이 많이 올라온다고, 배우들은 말했다.
    기자가 미안한 마음이 든건 그 다음 순간이다. "사람들이 볼거리 문화에만 관심을 갖는 것, 교회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교회를 짓는 것도 필요하지만 이런 일에도 투자해줬으면 좋겠어요." 신앙생활에 대한 이들 나름대로의 고충도 느껴졌다. 월요일이 휴일인 연극인의 생활 패턴상 주일성수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때문. "솔직히 내가 필요할때만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배우 권정욱씨의 말에 "나도", "나도 그래" 등 동료들의 답변이 메아리처럼 이어졌다. 이들은 또, "성극을 쓰는 작가가 없다"며 기독교 극본을 쓰는 것이 시급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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