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한국교회와 4.19혁명 

③ 한국교회와 4.19혁명 

[ 특집 ] 6월 특집 한국역사와 한국교회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0년 06월 17일(목) 09:58
"회개와 반성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이정일/ 광장교회 원로목사

올해는 4.19혁명 50주년이 되는 역사적 의미가 깊은 해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희년의 해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4.19혁명은 이 민족의 역사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 민중의 힘 그것도 기성세대가 아닌 젊은 청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를 새롭게 출범시킨 역사적인 혁명이었다.

혁명이전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헌정의 역사를 보면 서구 선진 민주국가의 경우와 같이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성취한 민주국가가 아니라 국제 연합군의 도움으로 해방을 맞이했고 연합국의 도움으로 해방 후 3년 만에 헌법에 명시된 대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 공화국을 건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의 헌법과 국가조직도 선진 민주국가의 헌법과 국가조직을 참고하여 제정하였고 이 나라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었기에 사실상 이때부터 민주 혁명의 씨앗이 잉태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4.19혁명 이전의 상황을 보면 해방 후 3년 만에 민주주의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서둘러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국가를 탄생시켰고 정부 수립 후 2년도 채 안되어서 동족상잔의 참혹한 6.25 전쟁이 발발하여 민주 헌정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3년간의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이승만 정권은 전쟁의 혼란한 와중에서 전쟁수행을 빌미로 민주화에 역행하는 온갖 반민주적 행위를 자행하였으며 휴전 후에는 장기집권을 획책하여 불법적인 개헌과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런 정치가 가능했던 것이 민주화의 훈련과 경험을 갖지 못한 기성세대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정권에 굴종하거나 침묵하였고 변화 보다는 안정을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한국의 개화기에 선도역할을 하고 교회를 통해서 민주주의 경험을 쌓은 한국교회는 과거와는 달리 예언자적인 사명을 저버리고 대통령을 배출한 집단으로서 집권자의 지지세력이 되어 온갖 불법과 부정을 자행하고 있는 이승만정권의 반민주행위를 보고도 수수방관하였고 침묵하였다.

참으로 교회가 세상권력과 밀착하여 부하뇌동하게 될 때에 예언자적인 안목이 흐려지고 세상권력과 함께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는 사실을 그 때 우리는 철저히 경험했다.
그러나 4.19 당시 젊은 청년 학생들은 해방 후 교과서를 통해서 민주주의 역사와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은 세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배운 것과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당시 정치현실에 그들은 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에는 이승만정권의 반민주행위에 분노하며 반독재에 항거하게 되었다. 

결국 반민주화와 독재의 길로 치닫던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장기집권을 위해 3.15부정선거를 자행하게 되었을 때 학생들은 지금껏 억눌렀던 분노가 폭발하면서 부정선거규탄과 반독재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그래서 먼저 어린 고교생들이 대구를 필두로 해서 전국에서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며 시위에 나서게 되었고 이를 저지하는 경찰들과 대치하는 가운데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같은해 4월 11일에는 학생시위에 나섰다가 행방불명된 마산상고 1학년생인 김주열군의 시체가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체 발견되자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3.15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4월18일 서울에서는 고려대학교를 필두로 반독재 시위가 발발했고 다음날 4월19일에는 전국의 대학생들과 일반시민들이 참여하는 반독재 정권타도운동으로 온 나라에 전개 되었다. 결국 전국의 시위대와 경찰이 대치하는 가운데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상자(사망 1백84명, 부상 6천여 명)가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4월 26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모든 책임을 지고 하야하므로 12년 동안 계속되어온 이승만자유당 정권은 마침내 무너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참 놀라웠던 사실은 이승만정부가 무너진 이후 학생들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같이 직접 집권하지 않고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고는 정치인들에게 모든 정치를 맡기고 학문의 전당인 상아탑으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만약에 4.19혁명의 주체들인 학생들이 탈레반과 같이 혁명완수를 위하여 집권했다면 한국은 오늘의 아프가니스탄 보다 더 혼란한 정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4.19혁명의 주역들인 한국의 학생들은 학생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쇠퇴한 대한민국 국가건설에 공로자들이 됨으로 자신의 위치에서 그 혁명을 완수해 갔다.

4.19혁명과 한국교회를 연관지어 생각할 때 한국교회는 뼈아픈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가져야 할 것이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가 주최한 4.19학생운동을 새롭게 조명하는 한 연구발표회에서 발제자는 선언하기를 한국교회는 4.19와 관련해 회개와 반성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고 뼈아픈 지적을 하였다. 그러므로 4.19혁명 희년의 해를 맞아 한국교회는 4.19혁명 당시의 부끄러웠던 교회 모습을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미완의 혁명으로 치부되고 있는 4.19혁명을 성공한 민주혁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오늘의 상황은 4.19혁명 당시의 상황처럼 교회가 집권자인 대통령을 배출하였다. 그것이 온 교회의 기도와 바램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타종교의 불만의 소리와 같이 현 정권이 너무 기독교에 경도되어있다는 견해가 많다. 이러한 때에 교회는 4.19혁명당시의 교회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 다시 한번 온 교회가 연합하여 4.19혁명정신을 계승하고 이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교회는 먼저 자기 혁명을 통해 새로워져야 한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교회 스스로가 먼저 민주화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감당해야할 선지자의 사명을 바로 감당하여 이 나라의 권력이 부패하고 타락하는 것을 예방하고 4.19혁명의 정신인 자유, 정의, 민주를 실현하고 파수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인재를 많이 양성하여 그 양성한 인재들로 하여금 이 나라의 민주 발전에 크게 기여하도록 하는 일에도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4.19혁명세대가 외치고 꿈꾸었던 민주 평화통일의 꿈을 실현하는 일에도 한국교회가 선봉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평화통일을 이룬 이 땅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실현하고 꽃피우는 성숙한 국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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