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한국교회와 1910년 국권피탈 

① 한국교회와 1910년 국권피탈 

[ 특집 ] 6월 특집/ 한국역사와 한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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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6월 01일(화) 12:13
나라 빼앗긴 절망 가운데 숨쉬던 '소망'

임희국 / 장신대 교수

올해는 한ㆍ일합방 조약체결(1910년) 1백년을 맞이하는 역사적인 2010년이다. 이 조약체결과 더불어 우리나라는 35년 동안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이에 모든 국민은 고통의 세월 속으로 떨어졌다. 그 고통이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데, 군위안부 할머니들과 원폭 피해자들의 일상이 이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최근에 한ㆍ일 두 나라의 지식인 2백여 명이 "한ㆍ일합방 조약이 불의ㆍ부당ㆍ불법하고 원천무효"라고 선언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 까닭을 곰곰이 되돌아보면, 그 이유가 여럿이었다. 국왕(황제)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의 무능함, 부패한 관리들,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정세 등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조선의 문호개방(1876년)에서부터 1910년 한ㆍ일합방에 이르는 국제정세가 가장 커다란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이 기간에는 일본(영국ㆍ미국)의 해양세력과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대륙세력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서로 충돌하였다. 조선은 오랫동안 쇄국정책을 고수하다가 마지못해 문호를 개방한 직후부터, 마치 들짐승들의 먹잇감처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마구 휘둘렸다.

조선정부는 그 틈바구니에서 벗어나고자 있는 힘을 다해 다양한 방면으로 노력했다. 정부는 근대화를 도모하면서 개화정책을 시도했다. 서양의 동점(東漸)을 파악하고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서양문물을 총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며 유교국가의 약점을 보완하되, 서양의 자연과학ㆍ군사ㆍ기술의 우수성과 유용성을 인정하고 이를 수용하는 길을 채택했다(東道西器論). 급진개화파들은 서양 선교사를 통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김옥균의 주선으로 일본에서 일하는 미국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가 1884년 6월에 한국을 방문해 고종에게서 학교사업과 병원사업을 하도록 허락받았다. 그 이후, 미국선교사 6명이 그 이듬해 부활절(4월 5일) 인천(제물포)으로 입국했다. 선교사들은 학교(배재학당, 언더우드학당<경신학교의 전신>, 이화학당 등)를 설립해 서양문물을 소개했고 또 병원을 세워서 환자를 치료하면서 서양의술을 도입했다.

선교사들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은 우리나라의 첫 교인들은 주체적인 자세를 가졌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와 나란히, 한국 교회가 스스로 학교를 설립해서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새문안(신문내)교회가 1895년에 '영신학당(永信學堂)'을 세웠다. 조선 정부가 근대화를 위한 교육담당 행정관청인 '학무아문'('학부'로 명칭변경이 됨)을 조직한 지 불과 1년 만에, 영신학당이 설립되었다. 정부가 1895년 7월부터 '소학교(小學校)'를 설립하였는데, 새문안교회의 영신학당 설립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것은 교회도, 정부와 나란히, 학교설립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1897년에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교육정책('our educational policy')을 확정했는데, 그것은 새 시대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되 신앙이 좋은 기술자ㆍ의사ㆍ농부ㆍ교사ㆍ공무원 등을 양육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것이야말로 장차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질 시민사회를 내다보면서 중산층 시민계급을 양성하는 교육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상공업에 종사하는 직업이 천대받았던 과거를 생각하면, 좋은 기독교 신앙인과 좋은 시민을 동시에 길러내는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그리하여서, 새 시대에 필요한 인재양성을 위한 학교설립 운동을 전국의 교회들이 전개했다. 장로교회 독노회의 통계표에 따르면, 1905년에는 전국의 장로교회 30% 정도가 학교를 설립했고 또 1907년에는 50%정도가 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초등학교(소학교)에서 중학교로, 중학교에서 대학교(숭실대학)로 발전되었다.

이렇게 교회가 인재양성과 학교설립에 주력하자, 이것을 우려한 세력이 있었다. 그것은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려는 일본이었다. 1904년 러ㆍ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체결(1904. 2)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군사활동을 인정하게 했다. 일본은 또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해(1905.11)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했다. 대한제국의 황제에게 내알(內謁)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일본인 통감을 두게 했는데,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초대통감이었다. 일제는 1906년 대한제국에 '통감부'를 설치해 교육행정관청인 '학부'에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이들은 학제개정, 일본어 도입, 교과서편찬에 개입하였다. 일제는 모범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그 당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사립학교를 견제했고 또 교회가 설립한 학교에도 제동을 걸었다. 1908년에는 일제가 '사립학교령'(1908년)을 공포해 학교설립으로부터 교재선택까지 낱낱이 간섭했다.

일제는 학부대신의 명령을 어긴 학교를 강제로 폐쇄할 수 있는 법령을 만들었다. 사립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회가 설립하여서 운영하는 학교도 탄압을 받았다. 1909년 이래로 교회가 설립한 학교의 수가 해마다 줄어들었다. 장로교회에 속한 소학교의 수를 계산해보면, 1909년에 6백94개였는데 한 해 동안 10개가 없어졌다. 그 다음 해에는 또 다시 50여개 학교가 없어졌고, 또 그 다음해(1912년)에는 또 1백개 가량 없어져서 전국 소학교의 수가 5백39개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조선 정부의 근대화 정책과 나란히 장로교회는 새 시대를 내다보며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것이 일제의 식민지배 야욕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우리나라의 운명이 이미 기울어지고 쇄잔해졌다. 1910년 한ㆍ일합병과 더불어 일제의 식민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나라가 망하여 땅을 치고 슬퍼하는 이 민족에게 새로운 소망의 빛이 비치었다. 복음의 빛으로 다가오는 소망이었다. 그 예를 한 두 가지 들어보고자 한다. 1902년 1월, 경상북도 대구 근교의 팔공산 한재에서 첫 세례식이 있었다. 세례받은 사람은 여성 1명과 소년 1명이었다. 그런데 이 여성은 이제까지 자기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없는 무명(無名)의 존재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세례를 베푼 선교사가 이 이름없는 여인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명성(明星, 밝은 별)'이라 했다. 이 이름 속에는 그 여인을 향한 소명이 새겨져 있었는데 "明星 곧 복음의 빛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비추어서 이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이 여인은 자기의 이름을 가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이것이야 말로 절망의 한 복판에 있는 민족에게 새로운 소망이 싹트는 사건이었다.

또 다른 사건은. 1908년 무렵 만주 간도의 용정마을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 곁에 학교를 세웠다. 이때 이 마을에서 교육선교를 시작한 사람들은 정재면과 그 일행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마을에 변화가 일어났다. 변화의 핵심은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존귀한 존재라는 신앙적 자각이었다. "천하 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남성 뿐만이 아니라 여성도 꼭 같이 귀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딸아이에게 정식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고 여성은 이름 없는 무명의 존재로 살기 마련이었다. 해묵은 관습에 따른 남녀성차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자각이 생기면서 용정마을이 이러한 해묵은 관습을 깨트렸다. 마을 처녀 모두에게 믿을 '신'(信)자를 돌림자로 써서 각각 이름을 지어주었다. 문익환목사의 어머니 김신묵여사도 이때 이름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복음의 능력으로 일어난 의식의 혁명이었다. 즉, 하나님의 혁명이었다. 여성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희박하고, 여성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의무가 노예사슬처럼 짐지워져 있던 관습을 깨쳐버리고, 여성에게 정식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한 사건이었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깨달음,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는 각성,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라는 인식은 우리나라 5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나라가 망하여 슬픔으로 땅을 치고 통곡하는 이 민족에게 복음의 능력 안에서 소망의 빛이 비치고 있었다.
일반 세속의 역사 속으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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