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 경계하고 복음으로 세상 품었던 신앙의 사표

분열 경계하고 복음으로 세상 품었던 신앙의 사표

[ 특집 ] 한경직목사 별세 10주기 특집<4> 한국교회에 남긴 '에큐메네'신앙유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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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22일(목) 10:55
민경배 / 백석대 석좌교수

한경직목사가 우리 한국교회와 오늘의 세계교회에 남긴 공적이 무엇일까. 어떤 것이 한경직목사를 그렇게 추모하고 기념하고 되새기기를 이렇게 전국적으로 하게 하는 것일까.

한경직목사님의 생애는 한국교회 1세기가 수록되어 있는 사기(史記) 자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 판단은 여러 가지 깊은 뜻이 있는 말이다.

   
▲ 프린스턴신학교는 개교 2백주년을 맞아 학교를 빛낸 동문으로,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한경직목사를 선정했다. 모교를 찾은 한 목사가 자신의 기념 초상화 제막식에 참석한 모습.

실제 우리는 한국교회가 한경직목사를 경계로 해서 한 세기가 지나간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목회하던 시대의 우리 한국 사회나 교회는 시대적으로 비교적 단순한 사회였다. 사회적 직종도 단순하고, 윤리적 표준도 비교적 균일하였다. 일원적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야말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의 권리와 주장과 입장이 가치판단에서부터 상극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엄청난 다원적 사회가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다. 교회도 교파의 차이 이상으로 피차 현격한 차이가 있는 목회 형태가 눈에 뜨이고 있다. 예배형태도, 강대상의 구조도, 설교 패턴도 실로 천차만별이다.

그런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한경직목사가 한국교회에 에큐메네 교회론과 신앙으로 한국교회를 정통화시킨 업적을 크게 남기고 가신, 그 기념비적 위치와 의미에 다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묘한 것은 교회나 사회가 다 그를 추모하고 존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보수나 진보에서도 그렇고 신령파나 복음주의 파에서도, 그리고 신 불신 간 어디에서도, 다 그를 한국의 대표적인 목회자 그리고 민족의 목자로 드높이고 있다. 그만큼 한경직목사의 영향력과 공적이 컸다는 뜻이 된다.

그런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우리가 한경직목사에게서 받는 깊은 인상은 바로 그 에큐메네 정신이다. WCC로 표상화된 그런 에큐메니즘이 아니라, 참된 의미의 성서적인 에큐메네 정신이다. 성서적인 의미의 에큐메네는 교회가 이 세상과 역사의 모든 현상에 관계되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확신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 때문이다. 그것은 한경직목사에게 깊이 영향을 준 프린스턴신학교 맥카이 총장의 영성 때문이라고 본다.

가령 한경직목사님은 후에 기독교장로회계의 거장이 될 김재준, 송창근목사와의 관계가 유난히 돈독하였다. 1920년대말 한경직목사는 프린스턴신학교에 유학할 때에 송창근목사나 김재준목사와 함께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손을 피차 굳게 잡고, 장차 한국과 한국교회를 위해서 함께 충성을 다해 헌신한다는 서약을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다들 한국에 돌아와 얼마 후에 해방을 맞았던 것이다. 이들은 곧 서울에서 다시 만나 일본 신도종교의 적산 건물들을 미군정청에서 인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김재준목사는 지금의 경동교회 자리에서 야고보교회를 시작하고, 송창근목사는 동자동에서 바울교회, 그리고 한경직목사는 저동에서 베다니교회 곧 오늘의 영락교회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6.25한국전쟁을 만나 송창근목사가 이북에 납치되어 가는 바람에 이 세 사람의 친근한 관계는 사라졌다. 누가나 다들 송창근목사가 계셨더라면 기독교장로회와 예수교장로회의 분열은 없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교회 분열은 신학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못지않게 인사의 문제가 역사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한경직목사는 처음부터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거의 신비적인 경건에 철저하였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교회를 그렇게 아끼고 계셨다. 한국교회는 역사적 정황이 분열을 거듭할 수 있는 여러 전기를 거쳐 갔다. 그때마다 한경직목사의 기도와 지도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그가 친하게 지낸 여러 교파의 목사들에서도 볼 수 있다. 기독교장로회의 김재준목사, 조향록목사, 강원용목사, 감리교회의 홍현설목사, 성결교회의 정진경목사, 구세군의 전용섭사령관, CCC의 김준곤목사,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조용기목사와도 아주 돈독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백낙준총장이나 김활란총장과도 아주 이심전심 한국교회 전국복음화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경직목사는 그의 신앙 중심에 에큐메네 정신이 처음부터 살아있었다. 교회와 세상은 그에게서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해방 직후 곧 1945년 9월에 북한에서 그 위험을 무릅쓰고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다가 그 계통의 학생들 주도의 신의주학생사건에서 1백30여 학생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목격한 일이 있다. 설교도 민주국가의 정신적 기초라는 주제가 압도하고 있었다. 한국교회 유수의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앙의 전위자인데도 민족과 국가 및 사회 그리고 세계에 대한 관심과 활동은 눈에 띄게 많았다. 그것이 자연스러웠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 이미지를 굳힌 장로교 영락교회를 세우고 그 신앙으로 그 체질로 굳힌 데에 주목을 해야 풀리는 문제이다.
그의 에큐메네 신학은 신앙 내연-외연의 구조를 철저하게 가지고 있었다. 교회의 경건한 예배를 중심으로 한, 그런 역사 참여이다. 곧 예배기능을 핵심으로 한, 교회의 예언자적인 기능, 구속적인 기능, 일치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6.25한국전쟁 중에 미국에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는 대표단을 이끌고 왕래하고, 북한 수복 때에는 평양에 대한구국회 회장으로 입성한다. 그리고 전쟁 희생자들을 구제하는 대대적인 사업과 교육에 헌신하고, 동시에 월드비전의 창설과 사역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세계적 부흥운동의 지도급 인사인 밥 피얼스나 빌리 그래함과 손잡고 전후의 세계의 신앙부흥운동에 전력하기도 하였다. 군복음화운동도 그의 발상이었고 거기에 정열을 쏟았다. 한국 NCC 회장을 맡았으면서도, 보수계의 로잔회의 중요 지도자로 활약하고, 국내에서는 한기총을 창립하기도 한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철저한 저항을 하였다. 신의주에서의 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월남 이후 반공청년단체인 서북청년회를 돕고, 감리교 김창준목사 주도의 기독교연맹이라는 공산주의 단체 결성에는 영락교회 청년들이 가서 처부시게 한 일이 있었다.

한국교회 정통의 복음주의 신앙, 그 전통을 지키면서도 이렇게 에큐메네 신학을 실천해 나간, 그 신앙의 폭은 한국교회가 지금 필요로 하는 소중한 재산이다. WCC 서울 개최문제로 한국교회가 피차 상극하는 오늘날 그의 에큐메네 신학의 정수가 새삼 청명되기를 바라는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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