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평생 헌신으로 응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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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4월 특집 / "장로교 초대 목사의 리더십을 말한다"-서경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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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08일(목) 09:58
차종순 / 호남신대 총장

한국 개신교의 전래 과정은 크게 두 경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북쪽 경로(서북쪽)는 평안도의 상인들이 중국을 왕래하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들과 접하며 복음의 전달자가 되었으며, 남쪽경로는 관직에 있는 상류층들이 일본에 사절단의 일원으로 가서 미국 선교사들을 만나 복음을 듣는 과정에서 일본의 선진농업을 배우게 되고 이어서 선교사들이 입국하는 정치적인 통로를 이용함으로써 한국에서 공적인 선교사업으로 이어졌다.

   
▲ 서경조목사
이 두 경로는 똑같이 성경을 번역하였다. 북쪽경로는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하여 한국으로 들여왔으나 보급되지 못하였지만, 성경번역에 참여하였던 한국인들이 교회를 설립하는데 이르렀으며, 남쪽 경로는 관리들이 성경을 번역, 미국 선교사들이 성경을 들여와서 선교사들이 교회를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그리하여 북쪽경로는 내국인에 의한 교회설립으로, 남쪽경로는 선교사들에 의한 교회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두 경로가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하나로 접합됨으로써 한국의 복음화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가기 시작했다.

두 경로의 만남에서 크게 활동하였던 사람이 바로 서경조목사이다. 그는 평안도 의주에서 출생하여 황해도 솔내교회에서 신앙의 기초를 쌓고 지도자가 된 후 초기 한국인 7인의 목회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한국교회의 기초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가 황해도 솔내지역에서 김성첨(담) 가문의 후예들과 맺은 인연은 곧바로 한국교회 초기 지도자 산맥을 형성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서씨 집안의 두 형제 서상륜과 서경조는 한국교회에서 잊을 수 없는 두 인물이다. 형 서상륜은 활달하고 사교적이며 사업가적인 기질을 가진 외향적인 사람으로서 장사를 통해 출구를 찾으려 하였던 반면 동생 서경조는 내향적인 학자풍의 사람으로서 사물을 깊이 성찰하고 생각이 깊은 인물로서 대조적이었다.

서경조는 1852년 12월 14일 의주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본명은 상우(相祐)이고, 경조는 자(字)였다. 서경조는 형 서상륜(1948년 7월 26일생)보다 더 어린 시절에 부모를 잃었다. 그리하여 정상적인 학교교육은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한문을 익혔으나 한서를 탐독할 수 있을 정도로 한문에 대한 조예가 있었다.

서경조의 기독교 입문은 크게 3단계로 이루어진다. 제1단계는 형 서상륜을 따라 만주를 왕래하며 기독교를 접하고 기독교인들의 겸손한 모습에 대한 감동에서 출발한다. 제2단계는 기독교 서적을 통한 지식습득의 단계이다. 서경조는 형과는 다르게 학자적인 관심에서 중국인과 서양인이 합작으로 경영하는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많은 서적을 보면서 신문화의 위대함을 배우고 동시에 기독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제3단계는 형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구미리 솔내로 이주하여 솔내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과정이다.

형을 따라 간 곳에서 로스(John Ross)가 보내 준 6천권의 성경 중 신약전서와 덕혜입문 등을 전해 받고 성경을 탐독하기 시작한 서경조는 로마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죄와 속죄의 도리를 깨닫게 됐으며, 최후로 성령과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함으로써 신앙을 갖기로 결단한다. 서경조의 입신(入信)과정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걸었던 대다수의 과정을 보여주는 본보기였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솔내는 그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서경조는 1887년에 세례를 받고 1919년 중국으로 떠나기까지 약 30년을 목회자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특징을 갖는다. 지금까지의 기록상 서경조는 1887년에 봄에 서울에서 혹은 가을에 솔내에서 언더우드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 수 있다. 이후 1888년부터 서경조는 선교사의 권서(勸書: colpoteur)와 조사(助師: helper)로 발탁되어 황해도 장연지방의 지도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언더우드는 서경조를 초창기 한국인 선교 파트너로 신뢰하고 있었고 서경조에게는 황해도 솔내교회로 부름받았다는 확고한 소명의식이 있었다. 여러 선교사들로부터 인정받는 한국인 동역자(조사/권사)가 됨으로써 자신의 삶이 오히려 좋아질 수 있었으나, 이를 거부하고 오로지 솔내교회로만 향하였던 서경조에게서 우리는 신앙인 혹은 교회 지도자로서의 곧은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서경조목사의 지도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첫째는 그의 학자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성경탐독과 성경교사로서의 유능함이며, 둘째는 공의회로부터 독노회와 총회에 이르는 기간에 보여준 그의 서기관으로서의 유능함이며, 셋째는 감사할 줄 아는 제안자였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서경조는 1904년에 평양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수업을 받고 1907년 9월 19일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서 목사임직을 받는다. 7명의 신임 목사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서경조는 목사를 대표하여 축도하는 순서를 맡음으로써 한국인 최초의 축도 목사로서의 영예를 가졌다. 서경조목사의 공헌은 아무래도 유능한 서기로서의 역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공의회에 참석하여 한글 회의록을 치밀하게 남겨둠으로써 후대에 '서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본보기가 됐다.

한편 언더우드와 함께 서울에서 동사 순회 전도목사로 사역하는 동안 어느 덧 서경조의 나이가 회갑을 넘기게 되었다. 이 시기에 60세를 넘긴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음을 감안할 때, 서경조는 1913년에 사역을 중단하고 제2의 고향인 솔내로 귀향하여 은퇴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서경조목사의 지도력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의리의 목회자이며 첫 부르심에 충실한 목회자이다. 두번째로 그는 공의회와 노회의 서기로서 기록의 중요성을 상기시킨 목회자이다. 세번째로 그는 추수감사절 제정을 주창함으로써 은혜를 아는 목회자였다. 네번째로 그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이민을 결정하고 해외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자녀들의 독립활동을 지원한 목회자였다.

물론 서경조 목사의 지도력은 자신의 목회활동과 더불어 가혼으로 사돈이 된 솔내지방의 김성첨 가문의 자녀들과 더불어 양 집안의 후손들의 영향력은 한국과 해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서경조 목사가 동료 7인의 목회자 가운데에서 비교적 빠르게 한국을 떠나 1919년부터 중국에서 생활함으로써 목회자로서 그의 활동은 1887년으로부터 1919년까지 한국에서 그리고 나머지 1919년으로부터 1938년에 이르는 기간은 중국에서 보이지 않는 영향력으로 남아 있었다. 이로 인하여 그는 한국교회에 더욱 더 크게 영향력을 끼칠 수 없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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