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따르는 길 위에서 살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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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 4월 특집 / "장로교 초대 목사의 리더십을 말한다" - ①방기창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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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4월 01일(목) 10:03
지난 2월 22일 총회 역사위원회(위원장:이만규) 94회기 역사세미나에서 발표된 방기창 서경조 송인서 양전백목사 관련 발제를 4월 한달간 요약 게재한다. 역사위는 장로교 최초 7인 목사안수 1백1주년을 맞아 지난 2008년 7월, 길선주 이기풍 한석진목사의 목회 리더십을 주제로 1차 세미나를 개최한 바 있다.(2672∼2675호 특집면 게재)

탁지일 / 부산장신대 교수

한국장로교 최초 7인 목사들 중 한 사람인 방기창(邦基昌, 1851~1911)에 대한 연구의 어려움은 자료부족에 있다.

   
방기창목사
대부분의 한국교회사 서술에는 방기창이 최초 7인 목사들 중 한 사람이라는 단편적인 정보가 주로 눈에 띌 뿐이다. 혹은 동학접주에서 목사가 되었다는 그의 특별한 이력에 대한 언급이 간혹 발견되기도 한다. 이렇듯 자료가 부족한 이유는 아마도 그가 1907년 목사안수를 받고 1911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며, 또한 방기창의 아들 방화중이 1903년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삶을 마친 까닭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제1회 '평남로회 회록(평양: 야소교 선교원, 1912)'에 수록된 길선주와 이기풍의 방기창에 대한 추모사를 통해 방기창의 자세한 이력을 알 수 있고, 캐나다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의 'The Vanguard: A Tale of Korea'에 동학접주로서의 방기창의 활동과 기독교로의 개종 이유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어 관련연구에 도움을 준다.

유학자 방기창(1851~1883)
방기창은 1851년 음력 7월 16일에 황해도 신천군 어로면 도촌에서 태어났다. 방기창은 서당의 한 유형인 사숙(私塾)에 8세에 입학해서 9년간 수학한다. 사숙은 유력 양반들이 자제교육을 위해 훈장을 모시고 교육비용을 부담한 교육기관이었다. 또한 22세에 3년간 사숙교사로 있었고, 28세에 향교나 서원에서 실무적인 책임을 맡았던 유사(有司) 직책을 수행한 것을 보면 유학자로서의 그의 배움을 짐작하게 해 준다. 하지만 방기창은 1883년 서학(西學)에 대응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도(道)를 설파하던 동학(東學)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되는데, 방기창이 동학운동에 참여하게 된 개인적인 이유에 대한 언급은 찾기 어렵다.

동학접주 방기창(1883~1893)
방기창은 32세에 동학접주의 직분을 맡는다. 접주는 각 지역의 동학교도들을 통솔하는 책임자였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동학의 교세가 늘어나게 되자 각 지역의 동학교도들을 관리한 조직으로 접주제도(接主制度)를 만든다. 이 제도는 각 지역의 포교소인 접소(接所)와 그 책임자인 접주를 두고, 동학의 포교활동을 담당하게 했다. 1백여 명 이상에게 포교한 사람이 접주가 될 수 있었는데, 방기창의 직책이 바로 접주였다. 하지만 동학지도자로서의 방기창의 삶은 총포를 앞세운 관군(官軍)의 공격으로 인해 최후를 맞게 된다. 게일은 'The Vanguard: A Tale of Korea'에서 방기창과 그의 동료들에게 닥친 위기의 순간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총에 맞아도 죽지않는다고 믿었던 방기창과 동학교도들은 관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죽거나 부상을 입고 혹은 체포되거나 흩어지는 신세가 된다. 승리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방기창은 중국군대의 힘과 신들의 도움을 받아 승리할 수 있다고 동료들을 설득한 후, 중국에 원병을 요청하러 간다는 명분을 가지고 길을 떠난다. 하지만 가야할 곳도 막막하고, 여비도 부족했던 방기창은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는 벽곡이란 도법(道法)을 떠올리게 되었고, 이를 터득하기 위해 새로운 도(道)를 익히고 있다는 그의 사촌을 찾아가게 된다. 그런데 그 사촌이 익히고 있다는 새로운 도는 다름 아닌 기독교였다. 바로 이것이 방기창이 기독교에 입문하는 계기가 된다.

사촌의 집에서 방기창은 선교사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을 만나게 된다. 그날 밤 그는 마펫으로부터 전도를 받고, 전도서적인 '덕혜입문(德慧入門, The Gate of Wisdom and Virtue)'을 받아 읽게 된다. 방기창은 이 책안에 "단순히 먹고 사는 방법이 아니라, 죽음과 공포와 평화와 기쁨에 관한 모든 것"이 어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마침내 방기창은 "내가 한번 끝까지 믿어보리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목회자 방기창(1893~1911)
방기창은 1893년에 입교한 후, 숭덕학교 교사를 거쳐, 전도사, 매서인, 조사,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의 직분을 신실하게 감당했으며, 1907년 9월 27일 독노회의 설립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게 된다. 안수 후 방기창은 중국 용강구성(龍岡區城) 목사로 취임한다. 주목할 점은 방기창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도, 민족에 대한 사랑의 끈을 결코 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896년 그의 아들 방화중과 함께 독립협회 평양지회의 창설회원으로 참여해 길선주, 안창호, 한석진 등과 함께 활동한다.

'예수교장로회조선노회 제5회 회록'(1911년)에 따르면, 방기창은 신병으로 시무를 사면 받고, 마침내 1911년 음력 10월 11일 오후 2시 10분 용강에서 하나님 품에 안긴다. 동역자들인 길선주와 이기풍은 방기창을 다음과 같이 추모한다.

"주를 믿으시는 첫날부터 주를 위해 높은 산을 넘어 다니시며 험한 길을 걸어 다니시고 밤에 잠을 편히 자지 못하고 단음식을 잡숩지 못할 때가 많았으며 믿지 않는 죄인을 위해 슬픈 눈물도 많이 흘리시고 죄에 빠진 형제자매를 위해 애통한 기도를 많이 하셨으니 이 목사의 주를 위해 행하신 열심성력을 생각할 때에 우리 일반 교우는 다 흠앙할바라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이 목사의 역사를 생각하여 이 목사의 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신 것을 본받기를 바라옵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길(way)'로 표현되는 것처럼, 기독교인이 된 후 방기창의 삶도 '길'로 표현될 수 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늘 순회전도의 '길'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1895년 매서인이 된 후, 1911년 9월 하나님 품에 안길 때까지 평안남도와 황해도 지역에서의 전도와 교회설립을 쉬지 않았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 나오는 방기창에 의해 설립된 수많은 교회들의 이름들은 그의 헌신적인 사역을 입증하고 있다.

교회와 민족을 사랑한 방기창
신약성서에는 쉬고 있거나 은퇴한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길선주와 이기풍의 증언처럼, 방기창은 기독교인이 된 바로 그 순간부터 오직 주님을 위해 높은 산을 넘으며 험한 길을 다닌 주님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편안한 잠자리와 따뜻한 식사도 멀리한 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채 고통 받고 있는 조선민족을 위해 울며 기도하는 것이 그의 삶이었고 목회사역이었다. 안수를 받은 후 4년 남짓 목회하다가 하나님 품에 안긴 한국장로교 최초 목사 방기창에 대해 알려진 바는 미약하지만, 그는 기독교인이 된 후로부터 죽기까지 민족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복음전도와 교회설립을 결코 멈춘 적이 없었던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방기창 목사에 대한 일차사료를 소장하고 계신 분들의 연락을 기다립니다. (jiiltar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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